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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3부작 / 폴 오스터 / 열린책들>
보들레르 : Il me semble que je serais toujours bien là où je ne suis pas. 다른 말로 하자면 :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 좀 더 의미에 맞게 해석한다면 : 어디든 지금 내가 있지 않은 곳이 내가 나 자신인 곳이다. 또는 아주 대담무쌍하게 옮기면 : 어디든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원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장(章)인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까지 읽고 독서를 중단했다. 요즘 같은 기분에 딱히 읽고 싶은 글이 아니었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 가운데, <페르디두르케>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이, <에브리맨>은 음산한 분위기가 나를 난감하게 했다면,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은 일종의 광기(狂氣)가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 다시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어나갈 생각이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책을 덮어두기로 했다. 한창 읽던 책을 덮어두고 다른 책을 집어드는 것이 좀 찝찝하긴 했지만, 그 대신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읽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글이 아닌 글이라고 해서 반드시 산뜻한 글을 찾던 것은 아니다. 다행히 폴 오스터의 글은 쑥쑥 읽혔다. 소설에 등장하는 레퍼런스들의 은유를 곱씹으며 읽어내려 가는 사이, 어느덧 마지막 장에 이르러 있었다. 처음에는 조르주 심농 류의 추리소설인 줄 알았다. 폴 오스터가 '추리소설'의 틀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추리의 귀결이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밝혀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추리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해, 이 소설을 구성하는 세 편의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이끌어나가는 논의는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사건이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식의 묘사를 즐겨사용하는지가 드러나는데, 나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뉴욕 3부작>에서 드러난 폴 오스터 식 글쓰기의 특색을 요약해보았다.
1. 걷기
첫 번째 장인 <유리의 도시>에서 '대니얼 퀸'이 '피터 스틸먼'을 뒤쫓는 모습, 두 번째 장인 <유령들>에서 '블루'가 '블랙'을 뒤쫓는 모습, 마지막 장인 <갇혀 있는 방>에서 화자인 '나'가 '팬쇼'를 뒤쫓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군가의 뒤를 밟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대개 가벼운 산책이나 여행처럼 묘사된다. <뉴욕 3부작>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뉴욕의 거리와 공원, 상점에 관한 구체적인 명칭이 표현되기 때문에, 마치 내가 뉴욕 시내를 거닐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2. 말과 글
첫 번째 장인 <유리의 도시>에서 학자인 '피터 스틸먼'은 '대니얼 퀸'과 대화하면서 "바벨탑의 신화"를 동원하여 말의 불완전성에 대해 역설한다. 사물과 결합되어 있던 말이 바벨탑의 붕괴와 함께 사물로부터 이탈되고, 사물과 말이 분리됨으로써 세상이 혼탁해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 더 나아가 그는 언어유희를 펼쳐보이기까지 한다. '대니얼 퀸(D.Q)'의 이름이 '돈 키호테(D.Q)'의 이니셜과 동일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돈 키호테가 실존인물이며 세계의 허구를 폭로하기 위해 산초를 동원하여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벌였다는 논의까지 밀어붙인다.
마지막 장인 <갇혀 있는 방>에서 '팬쇼'는 자신만의 글을 완성하는 데 매진하는 인물이다. 사실 이전의 에피소드에도 메모를 하거나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는 장면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렇지만 팬쇼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완벽한 글을 남기는 데 몰두한다. 비록 그 자신은 자신의 저술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지만, 문아일체(文我一體)를 경험한 그가 남긴 글은 세간의 호평을 받으며, 높은 판매고를 올린다. 그러나 그는 남들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리 도피한다. 심지어 문 너머로 오랜 친구에게 총을 겨누는 극한의 상황에서는 본인이 '팬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아마도 팬쇼는 자기 자신을 규정지으려는 일체의 시도를 거부하려던 것이 아닐까.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을 이어주는 두 번째 장은 "말-글"로 이어지는 중간단계에서 조금은 다른 소재가 활용된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첫 번째 장인 <유리의 도시>에서도 다양한 인용이 활용되지만, 비중 면에서 두 번째 장인 <유령들>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활용된다. 거지로 분장한 '블루'와 골목에 걸터앉아 대화하는 동안 '블랙'은 여러가지 일화를 늘어놓는다. 일견 글의 전체적인 흐름과 무관해보이는 이들 일화를 통해 블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삶의 방향이 어느 곳으로 튈지 알 수 없는 럭비공과 같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삶의 방향, 그 속에서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개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두 번째 장은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다.
3. 삶의 양면성/취약성/우연성
결국 폴 오스터가 바라본 '삶'이라는 것은 개척해야 하는 것, 순응해야 하는 것, 견뎌야 하는 것 등등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추리소설'의 틀 속에서 누군가의 뒤를 밟는 등장인물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시간이 흘러갈 수록 새로운 자신과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내린다. 선택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고 더 혼란스러운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그러한 선택을 피할 길은 없다. 이러한 선택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나의 삶'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진다. 물론 '자아의 발견'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장밋빛 전망을 저자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와 '나가 아닌 외부세계'의 상호과정에서 인생이라는 노정이 변화를 거듭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때문에 삶을 일면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삶이 견고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주어진 상황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에서 결정내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삶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야 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고 폴 오스터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덧. 연결고리?!
뉴욕 3부작(Trilogy)라고 할 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의 에피소드를 연결지어주는 장치들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아마 숨어 있는 장치가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나는 크게 두 가지로 연결고리를 엮어보았다.
a. 빨간 공책 : 퀸의 공책, 피터의 공책, 블루와 블랙의 공책, 팬쇼의 공책이 모두 '빨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더불어, 공책이라는 자체가 '글쓰기'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라는 점도 염두에 두자. 글을 쓰는 과정을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고, 나아가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다.
b. 이름 : 다시 한 번 책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마지막 장의 화자인 '나'가 결국은 '폴 오스터'가 아니었나 싶다. 좀 정리하자면, <유리의 도시>의 주요 등장인물 : 대니얼 퀸, 피터 스틸먼(아들과 아버지가 동명이인으로 등장), <유령들>의 주요 등장인물 : 블루, 블랙, 화이트, <잠겨 있는 방>의 주요 등장인물 : 나, 소피, 팬쇼(부수적으로 '퀸'과 '스틸먼'이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유리의 도시>, <유령들>과 연결됨). 좀 복잡한 구도지만 읽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c. 인물 : 이름을 정리하고 나니 정리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떠오른다. 좀 미스터리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피터 스틸먼'이다. 소설 속에서 '피터 스틸먼'은 총 세 가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버지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아들로서 '피터 스틸먼', 아들을 학대한 혐의로 징역형을 살고 퇴소한 '피터 스틸먼'의 아버지로서 '피터 스틸먼'(그러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자신과 똑같이 지었다), 끝으로 <잠겨 있는 방>에서 '나'가 파리의 어느 바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로서 '피터 스틸먼'.
여기서 빠진 게 한 가지 있는데, 첫 번째 장인 <유리의 도시>에서 '대니얼 퀸'이 '피터 스틸먼'을 미행하기 위해 역에서 기다릴 때, 그는 '피터 스틸먼'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의 뒤에 서 있던 쌍둥이처럼 쏙 빼닯은 또 다른 남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비록 그의 이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쌍둥이처럼 '피터 스틸먼'을 닮은 그 남성을 '나'가 파리에서 마주친 '피터 스틸먼'과 연결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아버지 '피터 스틸먼'은 평생 학자로 지낸 사람으로 나오고, 아들 '피터 스틸먼'은 아동 학대로 인해 평생 언어장애를 가진 인물로 나오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나'는 바에 들어온 '피터 스틸먼'을 보고 첫눈에 운동선수 아니면 변호사라고 판단하는데, 역에서 '대니얼 퀸'이 마주친 '피터 스틸먼'과 똑같은 외모 (그러나 한 쪽은 갓 교도소에서 나온 추레한 모습, 다른 한 쪽은 번듯한 정장 차림의..)의 남성을 운동선수 또는 변호사로서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아니 도대체 폴 오스터는 소설 속에서 숨은그림찾기를 몇 개씩이나 심어놓은 건지;;;) 아마, 폴 오스터는 이렇게 물고 물리는 장치를 이곳저곳에 심어놓음으로써 삶의 양면성 또는 의외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역시 횡설수설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설을 읽은 뒤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 좀처럼 감이 오지 않는 소제목(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잠겨 있는 방'은 소설에 등장하는 러시아 귀부인의 에피소드에서 짤막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대충 추론이 되기는 한다. 여튼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그만 줄여야 할 것 같다.
조르주 심농이 추리소설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개척했다면, 폴 오스터는 문학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색다른 소설이었다. 여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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