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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마음(Corazón tan blanco) / 하비에르 마리아스 / 문학과지성사>
듣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곧 안다는 것이며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귀에는 들려오는 소리를 본능적으로 차단하는 눈꺼풀 같은 것이 없으며, 이제 듣게 될 말을 미리 예측하여 조심할 수도 없다. 언제나 너무 늦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듣는 것으로 우리의 새하얀 마음이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창백해지고 두려움에 질리거나 겁에 질릴 수도 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정체될 것이다. 전 세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설임 속에 모두 다 무정형 상태로 부유하기만 하겠지. 사람들은 오직 잠만 자고 싶어 할 것이다. 지레짐작으로 하는 후회가 우리를 마비시킬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 동일한 행위들이 저질러지기를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행위들은 그 어떤 의지와도 관계없다. 행위들은 실현되는 순간부터 이제 말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말을 지워버린다. 행위들은 이전과 이후로 고립되어 버린다. 행위들은 유일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말에는 중복과 취소, 반복과 수정이 있고, 반박될 수 있고 상충될 수 있다. 말은 변형되고 잊힌다'
필립 로스의 책 두 권(에브리맨, 죽어가는 짐승)을 읽기에 앞서 잠시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소설을 읽을지 저울질했었다. 필립 로스를 먼저 택하기는 했지만 결국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작품까지 읽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스페인어권 작품들을 몇 권 읽었었다. 생각해보면 대개 남미문학이었고 스페인 본토의 문학을 읽어본 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정도가 전부이지 않을까 싶다. 때문에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작품을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따온 것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마음>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표현을 빌렸다. <맥베스> 중에서도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한 뒤 아내와 나눈 대화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범행을 완수한 맥베스에게 부인이 건넨 말이 소설에 추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시종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시종들의 얼굴에 덩컨 왕의 피를 묻힌 뒤 남편에게 되돌아와 그녀는 말한다.
'잠든 자와 죽은 자는 그림에 불과해요. 그토록 병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의 고귀한 힘을 잃어버리게 돼요. 이런 식으로 그 일을 생각하지 말아요. 그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리고 말 거예요. 그 생각 때문에 그렇게 지쳐버려선 안 돼요. 제 두 손은 당신과 같은 색깔이에요. 하지만 전 새하얀 마음을 가진 게 부끄러워요.'
이 대목에서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그녀가 "새하얀 마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평안함을 남편(맥베스)에게 전염시키고자 한 것 같다고 해석한다. 덩컨 왕의 시해를 사주한 것, 그러한 말을 내뱉은 것은 최초에 맥베스 부인이었으므로, 그녀 또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그녀는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맥베스>를 모티브로 하는 만큼, 이 소설 역시 "새하얀 마음"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온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 '나'의 이모 '테레사'가 그것이다. 맥베스 부인은 죄책감에 짓눌려 질식되었다면, 테레사는 자결을 택한다. 또한 희곡인 <맥베스> 못지 않게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이 시적이고 낭만적이다. 촘촘히 짜임새 있게 대상들을 병치시킨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세 명의 남자(기예르모, 빌, 란스)는 각각 다른 시공간에 등장하지만, 성격, 외모, 행동이 비슷하게 묘사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고전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의 문학이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이전의 작품들은 권선징악, 신의 심판 등 외부 요인을 끌어들여 우연적 요소에 의존하여 사건을 전개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르러 개인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과 그러한 개인적 성격이 빚어내는 희비의 교차가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말"이라는 부분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맥베스>를 다른 방향으로 변용한다. 이 모든 비극이 한 마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맥베스가 권력에 대한 야망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사주한 맥베스 부인의 말 한 마디, 또한 소설 <새하얀 마음>에 등장하는 잔인한 말 한 마디..가 작가가 주목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입으로 새오나는 말이 행동으로 옮겨진 순간, 말은 지울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떻게든 내뱉은 말을 표백해버리고 싶어도 행동으로 옮겨진 순간 그것은 불가능해진다. 말말말, 그것이 문제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눈꺼풀이 없는 귀야말로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다.
"말"이라는 소재를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하여, 작가는 의도적으로 '나'의 직업, 그리고 '나'의 아내인 '루이사'의 직업을 "통역사"로 설정한다. 직업상 '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루이사 또한 그렇다. 특히나 동시통역을 담당하는 직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순간에 소멸해버리고 마는 단어 하나하나를 놓칠까 조바심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포착한 단어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의미를 파고든다. 그럼으로써 그 의미는 점점 명징해진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쫓아가다 보면 "말"이 지닌 힘, 어디로 흘러가버릴지 모르는 파괴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에게 잠재한 선악, 원자화된 사회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실존적 고뇌, 사랑 등등.. 수많은 현대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새하얀 마음>의 경우 "말" 그리고 "말이 빚어내는 파장"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했다.
역자도 뒤에 밝히듯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표현이 다수 등장하여 번역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실제로 글을 읽으면서 퍼즐조각을 던져놓고 다양한 장치로 엮어낸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또한 시간이 닿는다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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