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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주제 있는 글/築。 2017. 1. 3. 20:17
<① 빌라 사보아 / Villa Savoye(1931), Poissy, France>
현대 건축을 논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 "르 코르뷔지에". 작년 12월 말 국내에서 "르 코르뷔지에 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건 고민할 것 없이 무조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정 다음날에 가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고, 도슨트 안내를 받으며 전시를 느긋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작년 6개국에 세워진 그의 건축물 17곳이 동시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뒤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기획된 전시라 더 뜻깊었는데, 도슨트해주시는 분께서도 방대한 분량과 양질의 콘텐츠를 강조하며 이번 전시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전시회가 광고는 그럴 듯 해도, 막상 가서 보면 사람들을 구경하다 온다거나(;;) 속 빈 강정인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도 이번 전시회는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1년 만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 다시 방문했다.
<② 공동주택 / Unite d'habitation(1952), Marseille, France>
<Peter Doig 作>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동시대의 다른 화가와 건축가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전에 포스팅한 피터 도이그의 작품에도 그의 건축물이 등장한다. 원색적인 색감과 기하학적인 선(線)이 낯설지가 않다. 한편 르 코르뷔지에는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安藤忠男)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르 코르뷔지에 展"에는 "안도 타다오 특별展"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함께 관람할 수 있다.
<③ 오두막 / Cabanon(1952), Roquebrune-Cap-Martin, France>
전시회는 총 8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각 주제를 차례대로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한 가지, 이들 주제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주제는 그의 직업적 소명과 예술정신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현대건축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만큼, 그는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통하곤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스스로를 건축가로 규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지망했고, 건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만큼 오히려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런 그가 말하는 예술은 '사람을 위한 예술'이다.
그는 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를 살았다. 집을 잃은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그는 효율적이고 쾌적한 주거 공간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였고, 그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만들어준 여러 이론을 발표한다. '사람을 위한 예술'이라는 철학은 건축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집을 설계하는 동시에 그가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회화 작업이었다. 그는 창의성을 단련하기 위해 단 하루도 붓질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뿐 아니다. 전시회에는 태피스트리에서부터 가구, 조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소개되는데, 그의 창작범위가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을 위한 예술'이라 할 때, 그가 늘 염두에 두었던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예술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작은 소품을 디자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④ 도쿄박물관 / Tokyo Museum(1959), Tokyo, Japan>
실제로 그는 시계를 세공하기도 했다.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 태생인 르 코르뷔지에는 시계 세공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필명을 쓰기 이전, 그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장느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자연히 시계 세공인이 되고자 했고, 그가 예술학교에서 공부한 것도 시계 디자인에 필요한 예술과정이었다. 그러던 중, 스승 C. 레플라트니(Charles L'epplatenier)를 만나면서 그의 진로는 미묘하게 선회한다. '장느레'는 스승의 주선으로 건축가 샤팔레와 함께 첫 건축물인 팔레 저택을 짓는다.
20대가 되어 동방으로 떠난 여행은 그에게 건축적 영감을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특히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깊이 감명받아, 며칠을 아테네에 머무르며 파르테논 신전을 몇 번이고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당대 지배적인 건축양식으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건축물들을 접하는데, 여기서 그는 역발상을 한다. 지나치게 장식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 는 것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가 얻은 결론이었다. 이처럼 그는 기존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통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 또 고민한다.
평소 자연의 본질에 어울리는 건축을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은 이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에 꾸준히 반영되지만, 아르누보에서 벗어난 반동적인 건축양식에 대해 레플라트니는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제자에 대해 스승은 애정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⑤ 롱샹성당 / Chapelle Notre Dame de Haut(1955), Ronchamp, France>
1917년 파리에 정착하고, 이후 평생 반려자인 이본느(Yvonne Gallis)를 만나면서 '장느레'는 국적을 프랑스로 옮긴다. 1919년에는 동료 오장팡(Amédée Ozenfant) 과 공동발간한 <새로운 정신(L'esprit Nouveau)>에 실린 내용이 건축계에 반향을 일으켰을 때, 필명인 르 코르뷔지에를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도슨트에서 비화로 소개하기를, 이번 전시회에 프랑스 대사와 스위스 대사가 모두 참석할 만큼, 르 코르뷔지에 展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는데, 축사(祝辭)에서 두 대사가 르 코르뷔지에를 각자 자국민으로 소개하면서 신경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어릴 적 이름인 '장느레'를, 건축가로서는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⑤ 롱샹성당 / Chapelle Notre Dame de Haut(1955), Ronchamp, France>
# 돔이노 시스템(Dom-Ino System)
도슨트를 들으면서 해설사가 가장 처음으로 꼭 기억해두라며 소개해준 이론이다. 비전공자인 나는 처음에는 '도미노 이론'이라고 들었는데(;;), '집'을 의미하는 라틴어 'Domus'에 '혁신'을 뜻하는 'Innovation'의 합성어라고 한다.
돔이노 시스템의 3요소는 바닥판, 기둥, 계단에 해당한다.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도식이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한층 한층 아래부터 벽돌을 쌓아올리는 조적식(組積式) 공법이 지배적이었다. 조적식 공법은 당연히 아래에서부터 위로 순차적으로 건물을 쌓는 반면, 돔이노 시스템에서는 먼저 큰 골격을 세운 뒤 파사드(Facade)를 비롯한 외벽을 만들기 때문에 훨씬 간편하고 실용적인 방식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각국의 국토가 폐허가 되자 국가는 대량으로 주거공간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돔이노 시스템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이는 르 코르뷔지에가 이후 현대건축의 5원칙으로 보다 성숙하게 건축기법을 발전시키는 초석(礎石)이 된다.
<⑥ 작은 집 / Petite Maison au bord du lac Léman(1923), Corseaux, Switzerland>
# 현대건축의 5원칙
1. 필로티(Pilotis)
르 코르뷔지에가 고안한 현대건축의 5원칙이 모두 충실히 반영된 최초의 건물이 바로 '빌라 사보아'다. 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2층짜리 건물에서 2층을 떠받쳐 주는 1층의 기둥(필로티)들이다. 외벽을 기둥이 대신하면서 빈 공간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온다습한 기후에서는 통풍이 용이하여 제습효과를 얻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설계를 응용하여 1층을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건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⑦ 귀뜨 주택 / Maison Guiette(1927), Antwerp, Belgium>
2. 자유로운 평면(平面)
이전에는 지지벽에 맞춰 건물의 평면이 구성되었다면, 기둥(필로티)가 도입됨으로써 비로소 자유롭게 평면구성을 짜는 것이 가능해졌다. 회화 작업에도 열심이었던 르 코르뷔지에는 오랜 동료 오장팡과 함께 '순수주의'이라는 미술사조를 개척하기도 했는데, 그림에는 직선과 곡선이 다양한 구도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그의 평면구도에는 곡선형도 과감히 도입된다. 바이올린의 옆면을 닮은 곡선이나, 반원형의 곡선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의 풍부한 표현력은 피아니스트이자 교사였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⑧ 바이센호프-지트룽 주택의 "옥상정원" / Maisons de la Weißenhof-Siedlung(1927), Stuttgart, Germany>
3. 자유로운 입면(立面)
평면과 마찬가지로 기둥(필로티)가 도입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 자유로운 입면이다. 20세기 초 회회계에서는 인상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피카소를 주도로 형(形)을 해체하기 시작하고 입체파(Cubism)가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사조(思潮)는 건축의 파사드(Facade)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사물과 인물을 담은 피카소의 그림이 때로 난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의 겉면 역시 훨씬 분방하고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순)
⑨ 공장 / Manufacture(1946), Saint-Dié, France
⑩ 메종 쿠루셰 / Maison du Docteur Curutchet(1949), La Plata, Argentina
⑪ 프루제 주택 / Cité Frugés(1924), France
⑫ 포르테 몰리토 임대아파트 / Immeuble Locatif à la porte Molitor(1934), Paris, France
4. 옥상정원
그는 사람이 살기 좋은 주거공간을 만드는 것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연과의 조화를 놓치지 않았다. 유년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레플라트니의 가르침대로, 건축물을 세울 공간을 자연으로부터 빌리는 만큼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건축에 반영한 것이 바로 옥상정원이다.
5원칙이 다 갖춰진 빌라 사보아의 옥상에 녹지가 가꿔져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인상깊은 옥상은 마르세유에 최초로 세워진 아파트, 즉 공동주택(Unite d'habitation)이다. 12층짜리 공동주택의 옥상에는 작은 정원이 마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카페와 수영장까지 구비하고 있으니, 1952년에 완공된 건물이 이토록 현대적일 수 있을까. 심지어 8~9층은 상가로 활용하여 공간 활용의 다변화를 꾀했다니, 오늘날의 주상복합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덧붙여 우리나라에서 르 코르뷔지에 식의 건물이 최초로 적용된 주상복합건물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하여 1968년 종로 4가에 들어선 '세운상가'라고 한다. 한때 노후화로 인한 재개발 문제로 사회적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60~70년대까지만 해도 유명 연예인이 거주하던 선망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가 무섭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잃지 말아야 할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르 코르뷔지에 展에서 느꼈다.
<⑬ 성 마리 드 라 투레트 수도원 / Couvent Sainte-Marie de la Tourette(1953), Eveaux-sur-l'Abresle, France>
5. 가로로 긴 창
바이센호프-지트룽 주택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길다란 수평창은 일조(日照)에 유리하다는 강점을 지닌다. 이 역시 오늘날 아파트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건축법이다. 원래 기존의 조적식 건물에서는, 하중을 지탱할 벽면의 견고함이 중요했기 때문에 창(窓)의 중요성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자연히 창의 모양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가 제시한 현대적 공법에서는 하중의 구애(拘礙)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비로소 커다란 창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앞서 건축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롱샹 성당'의 경우, 예외적으로 크고 작은 창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그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우 빛의 입체적인 느낌이 극대화된다고 한다. 가로로 긴 창에서는 벗어난 사례이기는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과감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그는 종래에 종교건물을 설계한 적이 없었으나 (더군다나 그 자신이 신교도였기 때문에 가톨릭건물을 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신부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성당 설계에 착수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설계한 종교시설이었던 만큼 그의 접근법도 남달랐을 것이고, 또한 한창 유기적 표현에 빠져 있던 당시의 예술적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⑭ 라 로슈-장느레 주택의 "필로티"와 "곡면" / Maisons La Roche-Jeanneret(1925), Paris, France>
# 모듈러 이론
5원칙 소개는 이쯤으로 하고, 끝으로 그가 고안한 '모듈러 이론'을 소개하면서 포스팅을 매듭짓고자 한다. (건축과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에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듈러 이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체가 활동하기에 편한 비율에 맞춰 건물이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경영학에서는 일하는 직원들의 동작과 작업량을 일일이 계산하여 경영방식에 혁신을 이끈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이 떠올랐다.
사람을 위한 건축을 구현하고자 한때 그는 수학과 기하학에 심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자세한 공식까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당대에 과학계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고 있던 아인슈타인이 르 코르뷔지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모듈러 이론'을 높이 평가하는 사실로써, 그의 이론이 지닌 가치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고자 한다.
이처럼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 초반의 장막을 걷어내고, 건축과 예술이 진일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⑮ 클라르테 공동임대주택 / Immeuble Clarté(1930), Geneva, Switzerland>
도슨트를 해주시는 해설사께서는 시대정신을 간파(看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것을 건축과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오늘날 배울 점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맺음말과 함께 해설을 마무리했다. 실제로 그의 건축양식은 후기로 가면서 점점 진화한다. 예를 들어, 게의 형상을 본떠 만든 유기적 형태의 롱샹 성당은 건축가들로부터 찬사 못지 않은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리에 멈추지 않고, 시대에 걸맞게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다.
<⑯ 문화회관 / Maison de la Culture(1953), Firminy, France>
한편 그는 중립적인 정치적 스탠스 때문에 오히려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의 정치적 중립성은 좌파로부터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우파로부터는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자신을 둘러싼 의혹의 눈초리와 비난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오늘날 다시 봐도 현대적인 그의 건축물은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이라는 쾌거로 이어졌다.
<⑰ 공공복합단지 / Complexe du Capitole(1952), Chandigarh, India>
'르 코르뷔지에'를 말할 때, 흔히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보니 쉽게 간과되는 것이 그의 인간적 면모다. 배우자 이본느에게 보내는 애정 담긴 편지, 혹평에 시달리는 피카소를 응원하는 편지, 부모님을 위해 고즈넉한 호숫가에 직접 설계한 '작은 집', 말년에 남긴 어머니의 초상화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따듯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본느와 함께 여생을 보낸 니스 해변의 4평짜리 오두막은 소탈한 면모를 보여준다. 재능면에서나 인성면에서나 대단한 인물이다.
끝으로 그의 사진을 실으며 이번 포스팅을 마친다:D (참고로 이번 포스팅에 1~17 순으로 번호를 매겨 올린 사진들은 모두 이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6개국의 건축물들이니 쭉 눈에 담아두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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