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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시자(Álvaro Siza)주제 있는 글/築。 2016. 10. 16. 20:55
<'98 리스본 엑스포 파빌리온, 리스본/포르투갈>
<페르디두르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가끔이라도 베짱이처럼 시간을 보낼 짬이 있었는데,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페르디두르케>는 이상의 <날개>만큼이나 난해한 작품이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는 했지만, 내게는 여전히 너무나 첨단적인 소설이었다. 그래도 소설이 쓰인 시기를 고려해보면 작가가 다룬 주제들이 상당히 시대를 앞서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문체를 소화하기가 버거웠다ㅋㅋ
한동안은 독서며 영화며 전혀 생각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느라 간단하게나마 글을 쓸거리도 없었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 "알바로 시자(Álvaro Siza)"다.
많은 지식을 책에서 얻는 편인데, 알바로 시자라는 건축가를 알게 된 것도 어느 책을 통해서였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잡지인 <엘 크로키스(El Croquis)>의 표지에 나온 순백색의 건물을 보고 이 건축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엘 크로키스>는 잡지라고 하기에는 양장본으로 된 묵직한 책이라서 가격만도 10만 원을 호가한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책들은 왜 이렇게 고가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중고 책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염가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비싼 가격이라 사지는 못했다. 이후 같은 서가(書架)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팔리고 없었다. 건축학도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책이라,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가들의 판본을 한두 권쯤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만난 내 또래의 건축학도도 <엘 크로키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건축가들 위주로 발간되는 책인데, 보통은 렘 쿨하스의 서적을 많이 찾지만 어쨌든 나는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에 꽂혔었다.
<세랄베스 박물관(Museu Serralves), 포르투/포르투갈>
우리나라에도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이 있다. 안양에 위치한 안양 파빌리온이 그것이다. 비록 안양 파빌리온을 가본 적은 없지만, 2012년 여름 포르투에 체류하는 동안 딱 한 번 그의 건축물과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 일주가 메인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포르투에서의 일정은 2~3일에 불과했다. 포르투에 오면 보통 시내 구경을 많이 하지만, 나는 엉뚱한 발상이 발동해서 기필코 대서양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서쪽 해안까지 쭈욱 빠져나온 뒤 Praia do Carneiro라는 해변에서 바다를 구경했다. 여기가 대서양이구나 하고 뿌듯하게 의미부여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다음, Parça do Império를 출발점으로 Av. do Mal. Gomes da Costa라는 대로를 따라 곧장 걸었다. 연녹색 야자수 잎를 비추는 햇살은 따듯했고, 도중에 발견한 올덴버그의 거대한 동상은 익살스러웠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세랄베스 박물관이었다. 벌써 4년 전의 일인데 당시에는 무슨 용기로 짧은 일정에 이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가면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미주알고주알 당시의 일을 세세하게 떠올리고 글로 옮기는 이유는, 아쉽게도 포르투갈 여행 중에 찍었던 대부분의 사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뼈아픈 게 포르투갈 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포르투 사진을 거의 잃어버리고 리스본 사진은 아예 다 잃어버린 일이다. 사진파일을 다 옮겨놨다고 생각했는데, 포르투갈 사진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깔끔하게(!) 포맷을 하신 관계로 몇 초 사이에 소중한 사진들이 다 날아갔다. 데이터 복원도 생각을 해봤지만, 대충 검색해봐도 저렴한 카메라 하나를 장만할 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기에 아쉬운대로 사진에 대한 미련은 접었다ㅠ
지금 기억을 떠올리면 포르투갈의 거리는 스페인의 거리와 색감도 상당히 달랐고, 스페인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스페인보다는 색이 선명하지 않고 후줄근(?)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게 또 나름대로의 매력이었다. 여행중 만난 어느 교사는 오로지 포르투갈에서만 2주 일정으로 묵고 있었다. 당시에는 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여튼 글을 쓰면서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자니 감회가 새롭다.
<말 그대로 바다 수영장(Piscina das Marés), 레사 다 팔메이라(Leća da Palmeira)/포르투갈>
각설하고, 세랄베스 박물관은 건물 자체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하나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주변 조경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분수도 멋있지만, 주위에 잘 가꿔진 연못이나 산책로 역시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분수 뒤에 위치한 분홍색의 건물 말고, 알바로 시자의 아이콘인 순백색의 건물동이 공원 초입에 외따로 세워져 있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당시에 건물 내부를 제대로 둘러보긴 했는지 내부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다=_= 다만 건물의 외관과 느긋하게 걸어다녔던 공원(Parque e Jardim da Fundação Serralves)만큼은 기억에 난다. 인적이 없어서 비밀의 정원을 거닐듯 유유자적 산책했던 기억, 그리고 한여름이라 한창 우거졌던 수풀과 거무스름한 연못에 대한 기억, 산책로의 끝에 넓은 잔디언덕이 드러났던 기억, 마지막으로 염소며 토끼며 여러 동물이 사육(?)되는 공간을 둘러봤던 기억에 이르기까지..
알바로 시자는 1992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건축가다. 프리츠커 상 수상에는 리스본의 시아두(Chiado: 우리말로 직역하면 '심술궂은 지역'이라는 의미다) 지역의 재개발 프로젝트에 공헌한 점이 높이 평가됐다. 시아두 지역은 산타 주스타 전망대(Santa Justa Lift)를 중심으로 하는 구시가지 일대를 일컫는다. 서울로 치자면 명동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리스본을 여행할 당시 해저물녁 산타 주스타 전망대를 오르긴 했지만, 아쉽게도 시아두 지역 일대를 천천히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명동의 오래된 건물을 갱생시킨다고 떠올려 봤을 때 상당히 대대적인 프로젝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주거(住居) 공간에 이처럼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건축가라는 직업은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리스본에 오면 도시의 명물인 에그타르트를 즐기며 식도락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포르투갈 자체가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여행지일 거라 장담한다. 사진을 잃어 영영 기억으로만 남겨두게 된 장면이지만 구시가지의 상 조르제 성(Castelo de São Jorge)에 올라 바라본 리스본의 전경과 그 너머로 펼쳐진 대서양의 푸른 바다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리스본 길거리에는 대마초 마약상이 참 많았다;; 그때는 마약상들이 하도 달라붙어서 위험한 도시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는데, 얼마전 마이클 무어의 <다음 침공은 어디?>를 보니 포르투갈에서는 마약 거래가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마약 거래를 단속할 수록 마약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한다는 판단에서, 시민들의 양심을 믿고 마약을 규제하는 법 규정 자체를 없앴단다. 마치 요새 대학가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무감독시험과 같은 원리를 도입한 셈이다. 마약 거래가 증가하는 대신 잠잠해지는 효과를 얻었다는데, 어차피 마약 거래 자체 100% 뿌리뽑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러한 시도가 마약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마약을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비율이 잠잠해져서 30%다,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과감한 정책은 사람들의 상호신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테하소 두 카르모(Terraço do Carmo), 리스본/포르투갈, 왼편으로 보이는 오래된 철골구조물이 산타 주스타 전망대>
알바로 시자에 대한 건축학적 해석을 풀어놓은 것도 아니고, 포르투갈 여행에 대한 관광정보가 담긴 것도 아니고, 다시 읽어보니 심지어 알바로 시자에 대한 내용보다 포르투갈 여행에 대한 잡담이 더 많은 것 같아 여느때처럼(?) 밑도 끝도 없이 삼천포로 빠진 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포르투에서 건진 사진 한 장과 함께 두서 없는 글을 매듭짓는다:D
오홋, 찾아보니 세랄베스 박물관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 아주 없지는 않다. 세랄베스 박물관 사진도 이따금 보이는데 건질 만한 건 없고, 그밖에 사진 몇 장을 싣는다.
#번외: Portugal
<Avenida do Mal. Gomes da Costa,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고택(古宅)>
<Parça do Império를 지나치며, 독수리 위에 올라앉은 사자>
<포르투는 와이너리 투어도 유명하다>
<도우로 강(Rio Douro) 위를 지나가는 유람선>
<포르투의 랜드마크 D. 루이스 다리(Ponte de Dom Luí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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