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 김영사>
물리학자들은 빅뱅을 특이점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알려진 모든 자연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다.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빅뱅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새로운 특이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개념―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지점 말이다. 그 지점을 넘어서 멀어지는 일들은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라고도 불리는 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사소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종교, 이데올로기, 국가,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과 함께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심지어 생명윤리 분야조차 "무엇이 금지된 행위인가?" 하는 다른 질문에 마음을 쏟고 싶어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유전적 실험을 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낙태된 태아에 대해서는? 줄기세포에 대해서는? 양을 복제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침팬지는? 사람은? 이런 질문들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이대로 브레이크를 밟고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종류의 존재로 업그레이드 하는 과학 프로젝트들을 중단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인간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는가?
한동안 자소서를 쓰느라 정신이 없던 시기에 글쓰기에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찾아보았다.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 가운데 유시민 씨의 책이 많았는데, 그가 추천하는 도서 가운데 바로 이 <사피엔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알았지만, 왠지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비슷한 내용일 것 같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왜 구세계의 문명이 신세계를 정복하게 되었는지 정교하게 분석하는 <총, 균, 쇠>와 마찬가지로, 좀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사피엔스> 또한 인지혁명-농업혁명-산업혁명 순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문명의 경로에 대해 소개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라 한다면, 가장 마지막 챕터인 "과학혁명" 부분인데, 여기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문명의 특징과 더불어 예상되는 사피엔스의 미래를 제시한다.
<인류가 기생충이라고?!!>
# 오늘날 인류가 걸어온 길에 관하여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p.135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군대, 경찰, 법원, 감옥은 사람들이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p. 167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있다.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거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p. 238
그냥 인상깊었던 문구를 발췌해 보았다. 그런데 미래를 예견하는 그의 직업이 역설적이게도 중세서양사를 전공한 역사가라는 점이 재미있다. 문자시대 이후에야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역사"라는 학문이 물리학-화학-생물학에 뒤이어 등장했다는 그의 분석이 흥미로웠는데, 결국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이자 창(窓)이라는 것이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논리로 가득했던 그의 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그는 두 번째 챕터 "농업혁명"의 마지막 논지 "역사에 정의는 없다"에서 젠더 문제를 다루는데 오늘날 만연한 성차별의 원인을 확실히 밝히지 못한다. 특히 전쟁수행능력에 관한 대목에서 전투에 임하는 데는 남성의 근력 뿐만 아니라 여성의 유화술 또한 역시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문에 성차별의 연원을 밝힐 때 흔히 거론되는 '근력론'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밖에 성차별에 관하여 거론되는 여러 근거들을 분석한다.
그가 확실히 규명하지 못하는 성차별의 오래된 연원에 대해서 나라고 확실히 알겠냐마는, 그가 묘사한 농업사회의 몇몇 대표적 특징들―대규모 전쟁, 농사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로 미루어볼 때, (비록 그는 근력론이 설득력이 없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남성이 근력 면에서 비교우위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극이라면 그러한 선천적 특질이 지배계급에 편입되는 데 용이한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시대에는 농업시대와는 전혀 다른 성질이 요구된다. 정보수집능력, 창의력, 소통능력, 유연성은 다가오는 사회에 강조되는 미덕이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사회에서든 지배-피지배의 구조가 영속적일지언정 그것이 성별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되며, 새로이 재편된 사회구조 하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자기계발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의문을 품었던 부분은 메가 문명―저자 본인이 이런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다―의 등장에 관한 대목이다. 유발 하라리는 지구촌이 점점 더 동질화되는 요인으로 돈, 제국, 종교의 세 가지를 꼽는다. 나아가, 인간이 문명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밈 이론'의 표현을 빌리기까지 하는데, 요새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지역주의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그의 예측대로 세계의 동질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라 생각했다. 물론 문명간 상호의존성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상호의존성이 늘어나는 것과 서로 다른 문명이 동질적으로 수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귀가 이식된 쥐를 과연 아름다운 피조물이라 볼 수 있을까?>
# 앞으로 인류가 나아갈 길에 관하여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난, 질병, 노화, 죽음은 인류의 피치 못할 운명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p. 375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p. 533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라고 교육 받는다. 광고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저질러버려!" 액션 영화, 연극, 연속극, 소설, 인기 팝송은 끊임없이 우리는 세뇌한다. "자신에게 충실하라."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라." "내면의 소리를 따르라." 장 자크 루소는 이런 견해를 가장 고전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선이고, 내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악이다." 유년 시절부터 이런 구호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은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가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자유주의에 특유한 것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대부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선함과 아름다움, 당위에는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p. 555
마지막 장인 "과학혁명" 이후로 유발 하라리가 전개하는 논리와 우려되는 미래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공감했다. 그의 말대로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을 과연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 읽었던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하나하나 풀어나간 철학적 명제들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무의미한 세계가 도래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세상은 그 어떤 것도 덧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 읽었던 또 다른 책 <마음의 과학>에서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생리학적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학자들의 여러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내가 느끼는 희로애락이 신경회로와 신경물질, 시냅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산출물에 불과하다는 이들 연구의 전제에서, 나는 과학자들이 거침없이 돌진하고 있는 연구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어떤 연구성과를 이루어낸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될까?그런 면에서, 그가 책의 마지막에 지적한 부분이 매우 와닿았다. 오늘날 생명공학과 관련되어 흔히 제기되는 질문은 "무엇이 금지된 행위인가"다. 부작위(不作爲)에 관한 소극적 접근만으로는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저자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 뒤 차원이 다른 종이 출현할 때―에 대비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화두는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또는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과학기술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이 도구가 어떤 방향으로 쓰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내가 사는 시대를 되돌아보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힌두이즘 이해하기 (0) 2017.01.28 이것이 인간인가 (0) 2017.01.18 프랑스사 (0) 2017.01.12 지하로부터의 수기 外 (0) 2017.01.09 러시아의 역사 II (0) 2017.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