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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 / 돌베개>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고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p.17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 운이 아주 좋을 경우 그게 더 낫다는 순수한 유용성 판단 정도를 따를 수는 있으리라.
―p.33
그들―포로―은 흐름에 역행해야 한다. 매일 전투를 벌이고, 매 시간 노역, 허기, 추위,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무기력과 싸워야 한다. 적에게 저항해야 하고 경쟁자를 동정하지 말아야 한다. 재치를 갈고 닦아야 하며, 인내심을 쌓아야 하고, 의지력을 키워야 한다. 또는 체면을 모두 눌러버리고, 의식의 빛을 꺼버리고, 짐승들이 싸우는 싸움터로 내려가 잔인한 시기에 일족과 개인들을 지탱해주는 비밀스러운 힘들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내고 실행한 방법들은 수없이 많았다. 인간들의 다양한 성격만큼이나 많았다. 방법들은 모두 전체를 향한 개인의 힘겨운 투쟁을 담고 있다. 그중 많은 수가 적지 않은 일탈과 타협을 수용하고 있다. 자신의 도덕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 채 생존하는 것은, 강력하고 직접적인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 한, 순교자나 성인의 기질을 타고난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뿐이었다.
―p.129
아우슈비츠 수용소로부터의 생환기(生還記)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담담한 그의 일기. 이 때문에 그의 기록에는 가해자로서 나치의 책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가 묘사하는 "회색지대"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따로 없다. 수용된 포로들끼리도 암투(暗鬪)가 벌어지며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수감자의 물건을 훔치거나 배식품을 착복한다. 이렇게 "회색지대"에서 수감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철저하게 표백된다. 오히려 나치의 잔인한 고문이나 폭력보다는 포로들이 굴종(屈從)에 길들여져 가는 과정이 그가 바라본 세상의 주된 풍경을 이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체험한 생생한 역사를 미시적 차원에서 기록으로 남겼다는 찬사와 함께, 상대적으로 나치의 책임이 도외시(度外視)되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이 여전히 독자들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비판을 뛰어넘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독자들(특히 어린 독자들)로부터 질문이 쇄도하면서 그는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짤막한 글을 따로 집필하는데, 프리모 레비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치'라는 존재, 그리고 '나치'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집단적 광기의 분출은 그의 이해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누군가가 나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대답한다. 파시즘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며, 또 다른 모양의 탈을 쓰고 다시 출현하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고.
프리모 레비가 나치에 대해 원망도 억울함도 품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인격을 지우고 그 빈 공간을 체념, 비겁함, 허기로 가득 메운 그―다른 포로들 또한 마찬가지다―에게 다른 누군가를 타겟으로 개인적 감정을 가질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치는 끝까지 치밀하고 집요했다. 나치는 수용소에 자신들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적당량의 당근과 채찍을 동원하여 대리인(나치에 협력하는 대가로 일정한 이익을 챙기는 포로)을 통해 수감자들을 조종할 줄 알았다.
우리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 그것은 꼭 명징(明澄)하게 겉으로 드러나지만은 않는다. 대다수의 진실은 흐릿함 속에서 어렵사리 분별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가 늘 파시즘에 대한 주의를 거두지 말라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힘을 가진 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며, 우리에게도 일제강점기에 관해 이런 글이 하나쯤 남아 있었다면 좀 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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