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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앙드레 모루아(André Maurois) / 김영사>
개인적·국민적·종교적 기반 위에 확고하게 구축된 프랑스의 아들, 신의 축성을 받은 사람, 기적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총사령관인 국왕은 그 어느 권력보다 강대한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때까지 최고 권력은 여러 형태를 취해왔다. 성 루이 왕의 정신적 권위, 샤를 5세와 샤를 7세의 계몽적 전제주의, 루이 11세의 교활한 현실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후 이 지배권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봉건제도, 삼부회도 이 지배권의 강화를 반대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군주제는 원만했으나 절대주의 향해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국왕의 보호를 고맙게 여겼다.
―p.159
프랑스는 영국과 이탈리아보다 계급 간의 장벽이 훨씬 높았다. 피렌체에서는 상인이 왕후가 될 수 있었고 영국에서도 부르주아계급이 기사와 함께 하원에 참여했다. 부르주아와 귀족간의 결혼도 흔했고 부르주아와 귀족에게 평등하게 과세했다. 프랑스에서 상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귀족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로 여겨졌고 삼부회에서도 제3신분은 별석에 앉아야 했다. 물론 귀족이 되는 길이 열려 있었으나 부르주아가 귀족계급의 특권을 얻으면 부르주아계급과는 절연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귀족계급의 권위가 그들의 정치적·행정적 통치 체젤르 담당하고 있는 데서 연유했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으로 존속하길 고집했으나 화승총과 대포시대에 이는 시대착오적인 희극이었다. 프랑스의 귀족은 기사도 정신에 충실한 나머지 현실 감각에 어두웠기 때문에 영국 귀족이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공동참여 같은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그들은 여전히 인품, 풍채, 예의범절, 문벌 서열 등을 지나치게 중요시했다. 스페인의 귀족들도 프랑스와 대동소이했으나 스페인에는 부르주아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계급 간의 투쟁이 프랑스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p. 173~174
"내겐 국가의 적 외에는 어떠한 적도 없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만사를 희생한 그에게 이것은 진실한 신념이었을 것이다. 리슐리외와 더불어 국가주의는 큰 성과를 거뒀다. …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널리 찬양하는 그의 대외정책은 지금도 프랑스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그의 대내정책은 평가가 상당히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그가 지방권력과 자유를 철저히 탄압해 과도하게 중앙집권제도를 수립한 것이 대혁명의 원인 중 하나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프랑스 왕조는 국왕과 귀족, 고등법원, 지방의회의 협력을 기반으로 수립되었다. 리슐리외는 왕권은 기하학의 점처럼 불가분의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국왕에게는 법률제정 권리와 함께 이것을 유린할 권리도 있다고 강조했다. 즉, 역대 국왕이 구축한 제도를 파괴해 발전성 없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창조했다."
―p.295
18세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부조리와 강압적인 제도의 잔재에 지나치게 시달렸다. 그러다 보니 전통이라고 해서 모두가 속박은 아니며 오히려 사회를 구축하는 골격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또한 모든 사회는 정권의 정통성, 즉 하나의 신화에 의존해 존재하며 그 신화를 바꾸는 데는 많은 혼란과 위험이 따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국인이 정치체제 변화에 성공한 것은 그 전환이 완만하게 이뤄졌고 신구(新舊) 두 가지 신화를 병존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의 특권과 조세제도 불평등으로 지탱하는 절대왕정제도가 지성의 발달에 따라 철저히 비판을 받았어도 머리를 집어넣을 또 다른 지붕이 없는 이상 집을 고치되 그 기본구조를 보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78~379
그(나폴레옹)는 사람의 허영심과 야심에 호소하지 않고 통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영예의 길은 가문이 아니라 노력과 용기로 성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제정시대에는 모든 시민이 공공기관에 대한 평등한 취업 권리를 누렸고 평등한 공공지출 부담 의무를 지고 있었다. … 그에게는 자기가 혁명을 정비했다고 말할 권리가 있었다. 그의 실패는 자유가 혁명의 근본 요소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여러 번 그렇게 말했지만 프랑스 국민은 자유보다 평등을, 평등보다 영예를 존중한다고 믿었다. 그는 프랑스 국민을 무정부상태에서 구출했고 그들에게 찬란한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는 국민에게 자신이 아무런 신세도 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최후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그와 견해를 달리했다.
―p.550
남미의 역사를 읽고 난 뒤 남미문학을 읽을 때,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를 읽고 난 뒤 러시아문학을 읽을 때의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그 나라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문학작품을 읽을 때, 내용이 훨씬 각별하게 다가왔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에 알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外>가 그러한 경우였다.
그 와중에 오래 전부터 꼭 읽어보고 싶었던 소설이 있었는데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라 독서를 미루고 미루다가 근래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 정도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사를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연달아 역사책을 읽은 뒤라 딱히 역사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전에 <미국사>를 통해 접한 적이 있었던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를 읽기 시작했다.
앙드레 모루아는 영미권 역사에 정통한 역사가이자 철학자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 듯 프랑스 태생이다. <영국사>와 <미국사>를 차례로 발간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은 그도, 처음 <프랑스사> 집필 요청을 받았을 때에는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본인이 객관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대한 객관적 관점에서 프랑스사를 썼다고 하지만, <미국사>와 비교하면 자국의 역사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것이 느껴졌다. 역사상 자국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낮아졌을 때에는 국력의 약화를 초래한 정부에 쓴소리를 하면서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반면 프랑스가 영예를 떨치던 시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는, 그 위용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그런 치우친 부분들을 유념하면서 프랑스사를 읽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한 한 친구가 프랑스를 '유럽의 중국'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 대한 배경지식이 별로 없었던 나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오만불손에 천방지축이지만 문화적으로 주변국에 막대한 영감을 준 나라' 정도로 이해했다;; 프랑스사를 다 읽고 보니, 그 친구의 표현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단순한 일반화인 것 같기도 하다.
각국의 역사를 읽어가다 보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공통된 요소―가령 넘쳐나는 악(惡);학정, 탐욕, 부패와 가끔 빛을 발하는 선(善); 리더십, 창의, 화합―들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거인(巨人)이 악(惡)이라는 왼발과 선(善)이라는 오른발을 번걸아 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족적(足跡)을 남기며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은혜로운 영광을 남기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점이 역사책을 읽는 묘미일 것이다.
# 엉뚱한 발상 1
만약 유럽대륙을 극동아시아에 지리적으로 대입해 본다면, 영국:일본, 대륙유럽(독일보다는 라틴계 유럽국가):한반도, 러시아:중국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발상을 해보았다. 실제로 프랑스사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와 공통된 성질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정치적 불안정과 타협의 부재(不在)가 그렇다. 1789년 대혁명을 통해 유럽에서 최초로 공화주의 정신이 분출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자리잡기까지는 총 두 번의 제정(帝政)과 수 차례 공화정을 전복해야만 했다. 1885년 기초를 닦은 프랑스의 헌법이 기치로 내세운 가치는 매 정권에서 번번히 묵살되곤 한다. 다행히 프랑스는 유럽대륙에서도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이 있는 위치에 놓여 있던 만큼 유럽에서 예술적 모범이 될 수 있었고, 전쟁 후에도 빠른 회복력을 갖출 수 있었다. 즉 대외적 위기와 대내적 분열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사실 사회에 단일한 목소리만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정말 무미건조한 사회일 것이다. 실제로 사회에는 서로 다른 가치들이 충돌한다. 문제는 충돌되는 가치들을 어떻게 조율하고 타협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으로 인해 네 차례의 사화를 치렀고, 조선 후기에는 붕당정치가 견고해지면서 두 차례의 환국을 겪었다. 그 끝은 영조의 탕평책이었지만, 이는 대승적인 타협의 산물이라기보다 일인(一人)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억지책(抑止策)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분단상태도 타협과 합의가 실패한 대표적인 케이스일 수 있겠지만,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까지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한다. 이들 모두 조화로운 타협정신이 결여된 상태에서 정치적 역량 부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경우에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들이 프랑스 못지 않게 많다는 것은 굳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 엉뚱한 발상 2
최근 우리나라에서 개헌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프랑스사를 개헌 이슈에 연결시켜 보았다. 현재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은 크게 세 방편이다 : 4년 중임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의원내각제로 추릴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을 모델로 한 4년 중임 대통령제가 가장 선호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의원내각제에 대한 선호는 가장 적다. 일찍이 장면 내각이 단명한 역사적 경험이 있는 데다, 아직 협치(協治)가 부족한 상태에서 의원내각제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4년 중임제를 선택하는 이유로는 중간성적을 국민들이 평가할 수 있다는 점, 정책의 연속성을 꾀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거론되는데, 얼마 전 또 다른 뉴스를 보니 학계에서는 개헌시 가장 바람직한 대안으로 이원집정부제를 꼽는다고 한다. 나 역시 이원집정부제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사실 근거는 빈약하다. 그냥 막연히 미국과는 정치적 토양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도 어렵다면 이원집정부제는 어떨까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을 뿐.
양당지배체제가 확고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정당간의 이합집산이 활발하기 때문에, 중임(重任)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연속된 정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처럼 4년 중임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한편 G7국가 중 미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프랑스의 경우는 이원집정부를 택하고 있다. 다당제이면서 일인통치(프랑스의 경우 과거 절대왕정 우리의 경우 과거의 임금)에 익숙한 프랑스 국민과 우리 국민의 정서를 고려할 때, 이원집정부제도 괜찮은 대안이지 않을까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문제다.
…
좀 더 정돈된 글을 써야 하는데, 떠오르는 대로 타이핑을 하다보니 "엉뚱한 발상"이라는 부제(副題)를 붙였다. 여튼 중구난방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프랑스사..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가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는 대목이 많은 만큼 이후 <영국사> 또한 읽어볼 생각이다. 일단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부터!!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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