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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비애(悲哀)일상/film 2017. 5. 14. 16:18
<세일즈맨/드라마/아시가르 파르하디/에마드(샤하브 호메이니), 라나(타라네 알리두스티)/125>
당신은 방금 왕이 걸어 나가시는 걸 본 거요.
고난을 겪는 훌륭한 왕이죠.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왕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멋지고 믿음직한 아버지였어요.
항상 자식들만 생각하고.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中 비프의 대사)
멋있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곧장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찾아 읽었다. 원작을 읽지 않고서는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여자를 다그치는 윌리
1. THEATRE
영화는 플루트 소리와 함께 어둠 속 무대에서 시작한다. 무대에서 배우들은 각기 맡은 연기를 수행하고 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은 아서 밀러의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가장 갈등이 고조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윌리(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된 '비프(큰 아들)'가 상처를 입고 꿈의 날개를 접어버린다. 원작의 이 장면은 앞으로 이 영화가 다룰 소재를 '암시'한다. 만약 연극이라는 창(窓)이 없이, 그저 어느 세일즈맨의 몰락을 다뤘다면 평범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원작이라는 창틀을 통해 관객이 영화라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에 '진짜 윌리'는 정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마저도 영화의 후반부에 잠깐 등장한다. 연극에서 '윌리'를 연기하는 배우인 "에마드(남자주인공)"는 어디까지나 배우, 그러니까 '가상의 윌리'일 뿐이다. '진짜 윌리'와 '연극 속 윌리'를 하나의 스토리로 묶어주는 연결고리는 의외의 대목에서 드러난다. 바로 에마드의 아내 "라나". 영화의 첫 장면―또한 희곡의 한 장면―은 "라나"가 어떻게 두 남자의 매개물로 등장하는지, 그리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준다.
시종 에마드의 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라나
2. CLUES
에마드와 라나는 집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의의 사고를 겪는다. 에마드의 부재중에 괴한이 침입하여 혼자 있던 라나에게 폭행을 휘두르고 겁탈하려고 한 것.
범인은 초범자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당황했던 건지, 집에 한 뭉치의 돈다발과 차 열쇠를 남겨두고 황망히 도망쳐버렸다. 아파트 계단에는 발을 무언가에 베였는지 피묻은 발자국을 버젓이 남겨 놓았다. 등 뒤로 급작스럽게 습격을 받은 라나는 공격해 온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아마추어 같은 이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웃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된 사실은, 이전 세입자가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해온 여성이라는 것이다. 뭇 남성들이 예전 세입자의 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범인을 특정지을 수 없는 상황. 이전의 여자 세입자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에게 접근한 어느 상사(商社)의 여비서와 똑같은 캐릭터다.
당연한 일이지만 라나는 자꾸 이 일이 밖으로 까발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로 라나는 한시도 혼자 있지 못하는 신경쇠약 상태에 이른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는 에마드는 그녀에게 '이번 일을 깨끗이 잊자'고 달래면서도, 남겨진 몇몇 단서들을 쫓아 집요하게 범인을 추적한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지병이었던 심장발작이 도지고 그의 가족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한다
3. THE SALESMAN
그리고 에마드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에마드가 쫓던 범인은 머리 희끗한 평범한 노년의 남성이다. 오랫동안 외판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건강상의 문제로 저녁에만 틈틈이 영업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아서 밀러의 '작품 속 윌리'가 아닌 현실 속의 '진짜 윌리'다.
그의 가족에게 본인의 죄를 낱낱이 고하라는 에마드에게 '진짜 윌리'는 동정에 호소한다. 그의 딸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 사위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을 들어가면서..
그러나 단호한 에마드는 그의 사위에게 전화하고 이윽고 그의 가족이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다. 라나 역시 에마드의 전화를 받고 같은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핼쑥해진 '진짜 윌리'의 모습을 본 '진짜 윌리'의 아내는 남편이 무슨 일에 연루되었는지도 모르고 남편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며 안도의 울음을 터뜨린다. 옆에 있던 딸과 사위는 혼절한 그를 부축한다. 이 와중에 '진짜 윌리'는 그의 부끄러운 '본모습'을 가족들에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中 린다의 대사)
4. HUMANITY
이전에 살던 집이 붕괴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라나는 이전 세입자가 잠시 보관을 부탁한 짐들을 매몰차게 끄집어냈다. 약속은 약속이라며. 그런 라나에게 에마드는 당장에 필요한 공간도 아니지 않냐고 라나를 설득한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뀐다. 에마드는 '진짜 윌리'에 대해 용서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반면, 라나는 그의 가족과 사회적 명예를 봐서라도 덮어주자고 말한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지 않겠냐는 듯이. 그렇지만 또 다시 물을 엎질러서야 되겠냐는 듯이. 이처럼 영화 속 갈등은 라나와 에마드의 입장 대립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과연 '진짜 윌리'에게는 어떤 처단이 내려질 것인가?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실제 연극 장면
5. TRAGEDIES
'진짜 윌리', '연극 속 윌리'든, 라나든 에마드든 공통된 사실은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사실이다. 꿈을 쫓아 당당히 살아가기에는 궁핍하고 힘없는 약자들이다. 영화에 잠깐 등장하지만, 이전 세입자의 전화기에서 착신 메시지를 되돌려보던 에마드는 그가 소속된 극단을 이끌던 "바박"의 목소리를 발견한다. 그가 믿었던 친구 바박 역시 이전 세입자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비극이다. 영화 <세일즈맨> 역시 비극이다. 인간적 비애와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 소시민을 옭아매는 사회의 굴레.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비참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밑바닥. 문학과 영화가 모두 공통적으로 묘사하고자 한 주제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직접 연극을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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