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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 조연과 주연, 주연과 조연일상/film 2017. 5. 27. 22:53
<네루다/드라마/파블로 라라인/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네루다(루이스 녜코)/107>
Puedo escribir los versos más tristes esta noche
오늘밤은 가장 슬픈 시를 읊을 것이다
오랜만에 이동진의 라이브톡을 현장에서 관람했다. 사실 네루다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보통 이런 영화의 경우 '대상인물을 더 알고 싶어서' 보거나 '대상인물을 알기 위해서' 보거나 이 둘 중 하나다. 고민 끝에 후자의 측면에서 영화를 관람하기로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이동진 해설가의 해설도 까다로워서―전달이 잘 안 되어서라기보다는 영화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집중해서 들었다. 참고로 영화는 시기상 스페인내전 이후 ~ 피노체트 집권 이전 시기의 네루다를 다루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1948년 약 1년간의 도피생활을 다루고 있다. 네루다가 다작(多作)을 한 시기는 아니지만, 정치적 망명 과정에서 작품세계에 변화를 겪는 시기이다.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네루다
1. BIOGRAPHY? or METAPHOR?
영화의 제목이 <네루다>이고, 영화에 네루다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언뜻 이 영화를 네루다의 전기(傳記) 영화라 생각하기 쉽다. 또한 그런 관점에서 네루다를 중심인물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형적인 전기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전기영화의 틀을 빌려 온갖 기발한 비유를 담은 예술영화―또는 허구적 전기영화―다. 감독 파블로 라라인 또한 전기영화보다 신선한 예술영화를 만드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또한 앞서 밝혔듯, 네루다의 일생 전체가 아니라 1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기라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장르 구분이다.
파블로 라라인이 이처럼 허구적 전기영화를 활용하는 까닭은 "인물―또는 당대의 역사―을 다면적으로 해석"하기 위함이다. 위인(偉人)이나 세계사는 어디까지나 "편집의 산물"이다. 과거의 여러 인물과 역사적 사실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것을 추린 것이 위인이고 세계사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일면적(一面的)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네루다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받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이기도 하다. 또한 칠레 대선에 입후보한 적이 있는가 하면, 부르주아지적인 삶을 산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여색(女色)을 지나치게 탐하는가 하면 결혼만 세 번을 한 인물이다.
네루다가 '대단한 인물이다', 또는 '형편없는 인물이다'라고 쾅 도장을 찍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네루다의 시적 세계 외에 네루다라는 인물의 심리를 탐구할 수 있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는 것, 그것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다.
점프컷 편집방식―개연성이 없는 급격한 장면전환 방식으로 누벨바그 양식에서 활용되기 시작―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일한 상황에 서로 상관이 없는 여러 장소를 등장시킴으로써, 하나의 인물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각도와 방식이 있음을 관객들에게 상기(想起)시킨다.
망명을 시도하는 네루다의 뒤를 쫓는 오스카
네루다를 집요하게 뒤쫓는 그림자경찰이자 네루다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2. LIGHT : Who is OSCAR?
영화를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고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다만 이번 이동진 해설가의 해설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들었던 부분이 "빛과 소리"에 대한 부분이다.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네루다 : 오스카 = 빛 : 어둠"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풀어 말하면 네루다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밝은 화면이, 오스카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조명이 등장한다.
미리 밝혀두자면, 오스카는 영화에서 실존인물이 아닌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나머지 인물들은 실제로 1948년 네루다와 함께 했던 인물이지만, 네루다의 정치망명을 막는 역할을 맡은 이 '오스카'라는 인물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굳이 네루다의 일대기에 허구적 인물을 개입시킨 것은, 마찬가지 이유에서 네루다라는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또는 객관적 관점에서 파헤치기 위함이다. 네루다가 태어나서 왕성하게 글을 쓰다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일대기는 어느 영화감독이든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파블로 라라인은 평범한 일대기를 제작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투입한 것이 '오스카'라는 가상인물이다.
영화에서 오스카는 매우 비천한 출신으로 묘사된다. 또한 네루다를 체포해야 한다는 임무를 맡고 분주하게 움직이기는 움직이는데... 정말로 네루다를 잡을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진의가 의심되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동료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네루다를 추적하는 오스카
.....네루다 잡을 생각은 있는 거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오스카'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질문이 남는다.
1. 네루다라는 자아의 어두운 일면, 2. 네루다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통로, 3. 일반 민중. 이동진 해설가가 설명한 오스카는 크게 3가지의 함의를 갖는다.
사실 네루다라는 인물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는 나로서는, 이 영화 전체가 실화(實話)라고 생각하고 봤기 때문에, 오스카라는 인물이 어떤 '메타포'를 지닌 가상인물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해설을 듣고난 시점에서 '오스카'의 역할을 파악해보자면, 역할 1과 역할 3의 함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역할 1 : 여색과 파티에 중독(?)된 인물로 네루다가 자주 묘사되고는 하지만, 감독이 네루다에게 잠재된 어두운 자아를 들춰내려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네루다의 실제 작품인 「모두의 노래」라는 책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또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견뎌내며 자기를 감시하고 겸열하는 누군가(오스카)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오스카를 역할 1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역할 3 : 내가 좀 더 무게를 두는 것은 역할 3이다. 자신이 경찰총감의 아들이라고 합리화하지만 어디까지나 창부의 자식인 오스카. 어딜가도 변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때문에 극중에서 오스카는 어두운 장소에서 얼굴의 윤곽조차 제대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암울하게 묘사된다. 당시 칠레정부의 탄압 아래 살아가던 민중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러나 오스카는 꿋꿋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는 장면도 점점 밝아지더니, 이내 안데스의 설원을 헤매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눈이 부실 정도의 밝은 화면에 그의 전신(全身)이 위치하기에 이른다.
여담이지만, 이동진 해설가의 해설을 다 듣고 난 뒤에도 남았던 궁금증은 왜 가상인물의 이름을 '오스카'로 붙였을까 하는 점이다. 평범한 출신의 이름 치고는 참 근사한 이름이지 않은가. 시간이 없어서 정해진 해설시간이 끝난 뒤 질의응답은 듣지 못했는데, 지금도 왜 이 가상인물의 이름이 '오스카'인지 궁금하다.
파티에 찌들어 살던 네루다도 도피생활을 거치면서 점점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구걸하는 소녀에게 깨끗하게 다림질된 흰 양복 상의을 입히는 장면
3. SOUND : Only Channel between NERUDA & OSACR
"조명(빛)" 다음으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영화의 "사운드(소리)"다. 영화의 전반에는 오스카의 내래이션이 깔린다.
영화에서 네루다와 오스카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은 "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오스카는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이므로, 오스카의 내래이션은 네루다 내면의 목소리, 자기반성의 목소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단지 오스카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을 뿐이다.
가령 라디오를 통해 칠레 전국에 네루다의 체포를 명하는 형사 오스카의 목소리는 네루다가 네루다 자신에게 건네는 경고의 소리, 번민의 울림인 것이다.
'오스카'를 통해 '네루다'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관람객의 몫!
'네루다'라는 한 명의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두 명의 서로 다른 인물을 동원하는 것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게다가 이 두 인물은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한 명은 어딜 가도 주목을 끄는 문학인이자 정치인인 반면, 다른 한 명은 은둔하는 형사다. 또한 전자의 삶은 화려하고 풍요한 반면, 후자의 삶은 평범하고 때때로 비참하다.
때문에 '오스카'에게 '네루다'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인물인 동시에 동경(憧憬)의 대상인 것 같다. 이 둘은 영화의 후반부―특히 안데스의 설원을 무대로 하는 장면―에서 점점 수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소리"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네루다는 안데스의 설원에서 곧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눈앞에 두고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거친 우짖음은 안데스의 산골짜기를 메아리로 가득 메운다. 그가 평소에 고혹적으로 시를 읊을 때 나오던 목소리와 확실히 구별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기본적인 생활조차 챙기지 못하던 그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일반 민중의 삶에 감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우짖음에서 마침 그는 어떠한 각오(覺悟)를 한 것 같다.
한편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오스카 역시 화답하듯 고함을 지른다. 우거진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네루다를 향해 연신 '파블로'라는 이름을 외치는 것. 마침내 '참된 네루다'를 만났다는 듯, 그는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삭혀 오던 '파블로'라는 이름을 외치고 또 외친다. 과연 오스카는 네루다가 아르헨티나로 넘어가기 전에 네루다를 잡을 수 있을까? 네루다와 네루다의 분신(分身)은 조우할 수 있을까?
조우(遭遇)하게 된다면 그 조우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또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석의 여지는 무척 방대하다. 그리고 그 해석의 결정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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