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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유리창, 전화벨, 그리고 바칼로레아일상/film 2017. 8. 22. 00:30
<엘리자의 내일/드라마/크리스티안 문주/로메오(애드리안 티티에니), 엘리자(마리아-빅토리아 드라구스), 마그다(리아 부그나)/127>
1. MODERN ROMANIA
이 영화와 감독 크리스티안 문쥬―<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라는 작품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가 고발하는 루마니아의 사회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루마니아의 근대사를 알아둘 필요가 있고, 루마니아의 근대사는 차우셰스쿠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루마니아의 제1대통령이었던 차우셰스쿠가 재임한 약 16년(1974~1989)은, 한 번 잘못 쓰여진 역사적 경로가 현재를 얼마나 좌지우지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독재자로서의 집권기간 동안 차우셰스쿠는 2,000만 인구의 루마니아인 대다수를 도청하여 말과 행동을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경제정책으로 농업자원이 풍부했던 루마니아에 경제파탄을 가져온다. 차우셰스쿠의 억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일종의 친위대인 '세쿠리타테'를 조직하여 신변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대대적인 프로파간다―한때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롤모델로 삼았다고까지 한다―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다.
마침내 1989년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차우셰스쿠의 공포정치는 종지부를 찍고, 군사법원에 넘겨진 차우셰스쿠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16년의 공포정치는 이후 루마니아의 현대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크리스티안 문쥬는 일찍이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통해 루마니아가 아직까지 지우지 못하는 차우셰스쿠의 근대사에 대해 낱낱이 폭로한다.
2. Broken Window & Telephone Call : Warning
때문에 '1991년 국가가 새로 세워질 때, 우리는 나라를 바꾸고자 루마니아에 남았지만, 지금까지도 루마니아는 변한 것이 하나 없다'고 말한 아버지 로메오의 대사는 루마니아가 처한 현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낸다.직업을 구하는 일, 경찰의 수사협조를 구하는 일,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에서조차 온갖 비행(非行)이 이루어진다. 공식적인 루트보다는 비공식적인 채널이 힘들을 발하고, 가만히 앉아 차례를 지키다가는 자기 몫을 챙겨갈 수 없는 시스템, 그것이 바로 루마니아의 사회 시스템이다.그런 면에서, 이런 비정상적인 협상이 이루어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치가 있는데, 바로 '깨진 유리창'과 '전화벨'이다.깨진 유리창 : 영화는 어느날 아침 뜬금없이 유리창이 깨지면서 시작한다. 이후 출근길에 다시 한 번 차의 옆유리가 산산이 부서진다. '깨짐'이라는 모티브는 또한 간접적으로는 딸 엘리자가 불의의 강간미수 사고로 팔이 부러지는 것과 연결되기도 한다.일련의 불쾌한 사고를 누가 일으켰는지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지만, 영화 후반부에 로메오가 내연녀 산드라의 아들과 놀이터에 함께 있을 때 잠깐 암시가 드러난다. 산드라의 아들 마테이가 놀이기구 앞에서 새치기한 또래 아이에게 '돌을 던진 것.' 로메오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묻자, 마테이는 말한다. "차례를 지키지 않잖아요."딸을 비롯한 주위사람에게 정직함을 가르쳐온 로메오. 그러나 그는 산드라와 부정(不貞)을 저지르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마테이는 정직하지 못한 로메오에게 당연하게도 돌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전화벨 : 영화의 주요장면마다 전화벨이 울린다. 특이한 점은 아무도 전화벨에 귀기울이지 않고, 심지어 전화벨을 꺼버린다는 사실이다. 엘리자가 용의자를 직접 대면하는 장면, 검사가 로메오를 방문하는 장면, 로메오의 어머니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하는 장면, 결혼기념식 행사에서 로메오가 입시담당자에게 성적조작을 청탁하는 장면, 경감이 '불라이'라는 거물에게 부정한 청탁을 하는 장면, 또한 로메오의 차가 정체불명의 동물을 들이받는 장면에서도 전화벨은 마치 배경음악처럼 울린다. 그러나 그 소리가 거슬리는데도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상황에 대한 문제인식이 전혀 없는 것.
'벨'이라는 모티브와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차의 경적'이다. 로메오는 도로의 특정지점을 지날 때마다 이유 없이 경적을 울리는데, 왜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경적을 울리냐는 엘리자의 질문에 로메오는 답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로메오는 산드라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출근한다는 표시로 경적을 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옳지 않음'에 대해 묵인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3. Baccalauréat : Opportunities and Fairness
아버지 로메오에게 엘리자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끝없이 수렁으로 빠져드는 흙탕물에서 발견한 머리 위 동아줄과도 같다. 그러나 입시시험(바칼로레아)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면서, 로메오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계획에 불가피하게 차질이 생긴 것.정상적으로 시험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딸 엘리자에게 아버지 로메오는 말한다."때로 과정보다 결과만이 중요하다.", "루마니아에 미래는 없다. 우리가 바로 그 산 증인이다.", "늘 정직하라고 가르쳤지만, 너를 생각해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그렇지 않아도 영국으로 떠나는 것을 마뜩이 생각하지 않던 엘리자에게 아버지의 잔소리가 곱게 들릴 리 없다. 아내 마그다 또한 엘리자와 의견을 같이 한다. 한 번 정도를 어기기 시작하면, 다음에 정도를 어기는 것은 더 쉬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의견충돌은 로메오와 로메오의 어머니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딸을 유학보내는 일에 눈먼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말한다. "인재가 다 떠나가버리면, 도대체 루마니아는 누가 남아 지킨단 말이냐." 그러면서 끝으로 덧붙인다. 다시 한 번 간곡히 청하건대 아버지의 묘를 제초해 달라고.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아들 로메오에게, 루마니아는 가치 없는 공간, 무의미하고 하찮은 곳이다.영화의 후반부에서 로메오의 불륜을 발각한 엘리자는 어머니 마그다에게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것을 종용한다. 딸의 요구를 수락한 로메오가 마그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둘의 관계는 되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지만, 로메오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한 이 시점에서 스토리가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부정(不正)함을 딛고 정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허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할 것이다.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로메오에게 활짝 웃어보이는 엘리자. 과연 엘리자의 내일은 어떤 '내일'일까.'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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