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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일상/film 2017. 9. 3. 00:36
<로우/스릴러, 공포/쥘리아 뒤쿠르노/쥐스틴(가랑스 마릴리에), 알렉시아(엘라 룸프), 아드리앙(라바 오펠라)/99>
모처럼 본 프랑스 영화. 굳이 스릴러, 공포물로 장르를 구분했지만, 아예 새로운 차원의 장르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불가해할 정도로 엽기적인 기행(奇行), 기괴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완결된다. 채식주의자였던 쥐스틴의 기이한 성장기는 한강의 「채식주의자」―채식주의자 영혜가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폭력을 고발하는 것―와 봉준호 감독의 「옥자」―공장식 가축사육 방식을 고발하는 것―가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맨 처음 포스터만 봤을 때는 오래된 영화가 재개봉한 줄 알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다가, 스크린에서 내릴 즈음 뒤늦게 봤는데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영화의 매력이 넘쳐나는 괜찮은 영화였다.
그러고 보면 '뒤틀린 욕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이나 「그녀에게」가 떠오르기도 한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던 쥐스틴은 대학에 입학한 후 육식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고삐 풀린 그녀의 육식은 그 끝을 모르고 인육을 탐하기에 이른다. 사실 쥐스틴은 체질적으로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식습관은 그녀의 부모에 의해 인위적으로 통제되고 조정되었을 뿐이다.
영화에는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가 얼마나 바닥을 드러내는지 여과없이 보여준다. 만취 상태에서 개 시늉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 언니의 손가락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은 가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가 단지 그녀가 지닌 욕망의 밑바닥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쥐스틴은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자각능력을 지닌 원숭이의 동물권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역설하는 모습, 반려견 퀵이 그녀의 허물을 뒤집어 쓰고 안락사되었다는 말에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녀가 선험적으로 자비심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욕망, 그것도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 욕망이 아무런 제재없이 표출될 때, 그 욕망이 비상식을 낳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내가 추려낸 가장 큰 메시지는 욕망의 주체가 '개인'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쥐스틴과 알렉시아의 부모는 일찍이 딸들에게 잠재된 위험한 욕망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부는 욕망의 위험성을 묵과하고 은폐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화가 스토리 전체에서 말하듯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애당초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아버지가 쥐스틴에게 고백하듯, 사태가 눈덩이처럼 불거지기 전에 문제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욕망도 일종의 역사적인 경로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욕망은 개인의 삶이 탄생함과 함께 태어나서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 안에서 영속적으로 대물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부(富)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흔히 나타나는 욕망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 자체와 욕망이 다뤄지는 방식은 다른 문제다. 욕망이 어떠한 영향력을 갖게 되고, 공동체의 타인에게 해(害)를 가할 때, 우리는 이 욕망이 다루어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욕망을 다뤄온 익숙한 방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욕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주저된다는 이유만으로,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로우(프랑스어 원제 : Grave)>라는 작품은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의 무게감을 묵직하게 전달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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