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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네오도쿄(Neo-Tokyo)일상/film 2017. 9. 17. 21:02
<아키라/오토모 가츠히로(大友克洋)/SF/카네다, 테츠오, 케이/125>
대단하다. 기술이 진보된 미래의 비극상에 대해 이토록 철학적으로 상세히 묘사했다는 것이 놀랍다. 내심 공상과학영화 <가타카>가 떠올랐는데, 이 영화보다 10년 앞서 개봉한 작품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의 애니메이션―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의..―인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보다도 7년 앞선 작품이다. 무려 1988년에 2019년을 묘사한 작품, 아키라. 이 시기는 일본의 경제가 한창 버블 경제로 치닫던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보면 묘사기법이 조금 뒤떨어지는 셀 애니메이션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년도를 감안하면 그 당시에 그만큼의 디테일한 묘사들을 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떤 묘사들, 이를테면 오토바이가 재빠르게 이동한 뒤에 남은 잔상을 후미등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현재 관객으로서도 참으로 참신하다. 2020년도에 도쿄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것을 무려 30년 전에 예견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더군다나 핵폭발이 있었던 3차 세계대전 이후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한 동안 이 애니메이션이 정확히 그린 미래상에 대해 한동안 회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 과학과 정치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테츠오(鉄男)와 카네다(金田)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여하간 이와는 별개로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본 대목이 정치가 과학에 영합(迎合)하는 스토리다.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영원한 제국의 영광은 없었다. 그리고 제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서 부(富)와 말초적 쾌락이 가장 흘러넘치는 시기는 '성(盛)'이 아닌 '쇠(衰)'라 생각한다. 달리 말해, '성(盛)'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사회, 문화, 정치, 경제가 정돈되고 체계를 갖추는 시기라면, '쇠(衰)'라 함은 이들 시스템이 해이해지고 부와 쾌락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 어느것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 시기다. 네오도쿄가 바로 그러한 도시이다. 3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를 재건했지만, 이내 사람들은 과거의 영락을 잊고 현재의 쾌락에 빠져지낸다. 이는 일본의 경제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버블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던 88년 당시를 매우 적확하게 비유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어떻게 인식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더 정확히는 정치적 동물―이기에, 반응이 표출되는 방식은 집단적이고 때로는 조직적이다. 먼저 기존에 수립된 정부(또는 대령을 위시한 군부)는 올림픽 유치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회유하는 한편, '아키라'라는 미지의 생명체를 통제한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지듯이 정부는 반정부군을 조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아키라에 대한 정보를 흘리기도 한다) 한편 대척점에 서 있는 반정부군은 시위를 주도하는 동시에 아키라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활로를 모색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다수의 시민들은 사회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키라'라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정부에 동원되거나 반정부군에 동원된다.
아키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당히 후반부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반정부군,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인 다수의 시민들은 '아키라'라는 어떠한 존재를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채 밑도 끝도 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인다.
나는 이러한 부분이 이 애니메이션이 우리 사회상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가령,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으면서 실제로 탈원전 문제를 놓고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좀 더 시선을 가까이 두면, 한반도의 경우 북핵 문제가 언젠가부터 우리 정치의 상수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북핵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치권마다 입장이 다를 뿐만 아니라, 국가에 따라서도 입장이 다르다. 과학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을 연구개발하는 것도 인간,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인간, 그리고 그것에 정치적인 프레임을 덧씌워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인간이다. 정치적인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이를 '정치가 과학에 영합한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고, 이를 이 애니메이션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2. 과학과 작품의 철학
이 부분은 등장인물 별로 살펴보는 게 내 생각을 정리하기에 더 편할 것 같다.
A. 테츠오
소심하고 약골이었던 테츠오는 자신에게 숨겨진 능력을 발견한 뒤, 점점 분별없는 폭군으로 변해간다. 테츠오가 고속도로에서 특이생명체인 타카시와 충돌했을 때 새로운 능력을 깨닫는 장면은, 인간이 새로운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으로 도약하는 장면이기도 한다.
그런 테츠오에게 극중 등장인물인 마사루는 충고한다. "네 능력을 쓰기에는 너무 일러." 그러니 섣불리 능력을 쓰지 말라고. 그의 능력이 세계에 파멸을 가져올 거라고. 그러나 테츠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다. 거리낌 없이 사람의 생명을 짓밟고, 도시를 파괴한다. 마침내 그는 아키라가 되지만, 동시에 아키라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즉 테츠오는 아키라와 접점을 갖게 된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고 기괴하고 흉측한 괴물이 되어버린다. (센과 치히로에서 카오나시가 괴물로 변하는 것과 똑같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심취되어 맹목적인 신뢰를 보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B. 카네다
카네다는 테츠오의 곁에서 늘 어려움을 함께 했던 용감한 소년이다. 테츠오는 그런 카네다에게 열패감과 고마움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지녀 왔던 것. 카네다는 절친 테츠오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사태가 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카네다가 테츠오를 보살피던 시점은 인간이 과학을 통제할 수 있던 시점이라면, 테츠오가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고 카네타의 보살핌을 떠난 순간 과학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카네다는 실수를 저지르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돌파구를 모색하는 우리 인류를 떠올리게 한다.
C. 케이
케이 역시 카네다의 조력자로서 파괴된 사회를 회복시키려는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자 반정부군 활동에 가담했던 소녀다. 카네다와 다른 점이라면 또 다른 특이생명체 '키요코'―애니메이션에는 특이생명체가 세 명 등장한다. 타카시, 마사루, 키요코가 그들인데 제각기 다른 염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테츠오의 폭주에 위기감을 느낀 키요코는 미래 예지능력을 지닌 인물인데 테츠오를 저지하기 위해 케이를 매개체로 이용하기로 한다.
참고로 특이생명체 3인(타카시, 마사루, 키요코)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자면, 3차 세계대전의 핵폭발 결과로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염력을 얻은 극소수의 인물들이다. 현재로서는 군연구소 아래 통제되고 있는 처지이지만, 테츠오를 어떤 식으로는 막으려고 애쓴다. 핵폭발의 상흔을 의미하는 동시에, 반핵(反核)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는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케이는 이러한 비전(키요코)과 연결되어 중요한 순간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D. 아키라
완전무결한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아키라. 그런 아키라는 알고보면 주 올림픽경기장 지하의 고철더미에 보관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봉인이 해제되고 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난폭한 존재로 돌변한다.
인간의 호기심에는 방향이 없이 무한하다. 인간의 호기심이 존재하는 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에는 방향이 있고, 욕망할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과학기술이 이용되는 방향과 범위는 제어될 수 있다. 아키라라는 존재가 말하는 점은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곪은 부위는 언젠가는 터져서 새살이 되거나, 그대로 방치되어 썩는 법이다. 아키라의 붕괴 이후 오토바이를 몰고 유유히 화면에서 사라지는 등장인물들. 오토모 카츠히로는 곪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이 터져버릴지언정) 새살을 돋워낼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곪은 현실을 외면해서, 사회의 폐부가 방치되는 것보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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