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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Miles)일상/film 2017. 9. 19. 00:16
<베이비 드라이버/에드거 라이트/범죄, 스릴러/베이비(앤설 엘고트), 데보라(릴리 제임스), 독(케빈 스페이시), 버디(존 햄)/113>
이번 주말 날씨가 너무 좋았다. 오전에 잠시 학교를 다녀온 뒤, 집에 돌아와 그대로 뻗어버렸다. 한 시간 반쯤 자고 깨어나니 뭔가 집에 있기는 날씨가 아깝고, 그렇다고 잡혀 있는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라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 좋은 날씨를 두고 집 가까이 영화관에 갔다=_= <베이비 드라이버>는 원래 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 리스트에 있지는 않았는데, 평점이 워낙 좋길래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포스터만 보고 대충 범죄물이겠거니 하고 생각했고, 생각했던 범죄물이 맞았다.
평점만큼 기대가 컸던 것일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였다. 영화는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드라이브>와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운전 능력을 지닌 운전수가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씬과 함께 시작한다. 인적이 드문 쇼핑몰 주차장에 도주용 차량에서 이동용 차량으로 옮겨타는 것까지 똑 닮아 있다. 그래도 <드라이브>와 다른 볼거리들은 있는지라, 추격씬을 재미있게 봤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화의 주제가 뻔했기 때문이다. 선량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의 대결, 불가피한 갈등, 선량한 사람이 사랑의 힘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간다는 내용의 스토리는 좀... 진부하지 않은가.
1. 촬영기법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게 봤던 부분은 촬영기법이다. 도주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주인공 '베이비'가 다음날 '옥탄(Octane)'이라는 단골 카페에서 네 컵의 커피를 테이크아웃한 뒤 범죄의 아지트로 향하는 장면이 영화 초반에 등장한다. 이때 '베이비'가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심취한 채로 애틀랜타의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매우 유쾌하게 묘사되는데, 더욱 특이한 점은 화면전환 없이 롱타임으로 이 장면을 촬영했다는 점이다. ('베이비'와 '데보라'가 세탁소에서 함께 하는 신, '베이비'가 대부를 위해 아침을 차려주는 장면도 참 유쾌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라라랜드에서 주인공들이 뮤지컬 컨셉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늘상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베이비는 복고풍의 힙합, 락, 자작곡을 듣고 다니며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덧붙여 아기자기한 애틀랜타의 풍경은 덤이다. (비록 내가 아는 한에서 애틀랜타는 미국에서 범죄율이 최고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2. OST
또한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단연 ost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곡들이 영화에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베이비'가 취미로 음악작업을 즐겨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참신한 느낌의 신나는 곡들도 등장한다. 실제로 음악은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서로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이기도 하다. '베이비'와 '데보라'가 만남을 유지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 '베이비'와 '버디'가 공범자로서 연결고리를 갖게 하는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음악은 '데보라'의 청력 이상을 해소해주는, 주인공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과도 같은 존재다. '베이비'에게는 그의 청력 이상을 돕는 역할을 넘어,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주는 매우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다.
3. Places
애틀랜타 시내 풍경이 알차게 담긴 영화는 처음인 것 같다. 애틀랜타 매거진에서는 아예 <베이비 드라이버>가 촬영된 장소들의 리스트를 싣고 있다. 특히 '베이비'와 '데보라'가 처음 근사한 데이트를 즐겼던 '바카날리아(Bacchanalia)'나, '베이비'와 '데보라'가 처음으로 만났던 'Bo's Restaurant'은 애틀랜타에 실제 존재하는 장소들이다. 장소의 측면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곳은 '길(road)'이다.
“All I want is to head west on 20, in a car I can’t afford, with a plan I don’t have. Just me, my music, and the road.”
길이라는 공간은 '베이비'가 어릴 적 단 한 번의 실수로 발을 담그게 된 범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베이비'와 '데보라'의 해방구를 상징하기도 한다.
4. Name
이름에 관해서도 몇 가지 유추할 만한 부분이 있다. '뱃츠(Bats)', '버디(Buddy)', '달링(Darling)' 등은 범죄조직에 가담한 인물들의 특징을 매우 잘 살려주는 이름들이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단연 '베이비(Baby)'이다. '이름'은 이 영화에서 각별하게 다뤄진다. 첫만남에서 '베이비'와 '데보라'는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기까지 주저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가명을 사용하는 범죄를 완전은폐하기 위해 실명을 밝히길 꺼려한다. (실명이 드러나는 시점에 이들 범죄자들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되돌아와 주인공의 이름이 엉뚱하게도 '베이비'인 까닭은 별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어엿한 청년이 되어서도 유년시절의 아픔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누에고치 안에서 꺼내주는 것이 '데보라'다. 영화의 끝에서 '베이비'의 실제 이름이 밝혀지고 '데보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베이비'의 선량한 행동이 정상참작될 수 있도록 증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베이비'는 더 이상 '베이비'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참고로 '베이비'가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Good Fellas'라는 피자가게 역시 '베이비'가 선량한 청년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의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간단치 않은 일인지 보여주는 역설적인 상호명이다)
여하간 재미 요소가 많은 영화라 사람들에게 추천을 하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기대치를 100%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던 영화였다. 몇몇 뻔한 장면들도 있었고, 주제의식을 흐리는 에피소드들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같은 범죄물 장르의 <유주얼 서스펙트>를 봐서 그런가.. 기발함이 부족했다는 느낌은 있지만, 청춘남녀의 풋풋한 로맨스 연기도 돋보이고 볼 만한 영화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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