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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게스트/스릴러, 미스테리/오리올 파울로/아드리안 도리아(마리오 카사스), 버지니아 구드먼(안나 바게너), 토마스 가리도(호세 코로나도)/106>
카탈루냐 독립투표가 진행되고 중앙정부와 자치정부간의 충돌이 있던 날, 공교롭게도(?)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봤다. 원제는 <Contratiempo>. 처음에는 '시간을 거스른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작은 사고(mishap; accident)'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영화 자체가 '과거의 사건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에르헤(Bierge; 피레네 산맥 인근에 자리잡은 도시로 우에스카(Huesca) 지방에 속한다)라는 소도시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이야기의 발단이 되는데, 에스카라이(Ezcaray)라는 소도시에서 발생하는 범죄사건을 소재로 하는 스페인 드라마 <올모스와 로블레스(Olmos y Robles)>가 연상되었다. 그런가 하면 깔끔하게 정비된 바르셀로나의 에이샴플라(Eixample) 일대와 설산으로 에워싸인 비에르헤의 풍경이 대조되면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영화는 비슷한 장르의 <히든 페이스(La Cara Oculta)>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실제로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맞물리는 플롯들과 주인공의 어두운 단면, 그리고 이야기의 반전이 매우 닮아 있다. 그러고 보면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유럽 안에서도 조금은 독특한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2012년 스페인에 여행 갔을 때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밝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영화라는 창을 통해 스페인을 보다 보면,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와 개인의 뒤틀린 내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또 한 가지 부분은, 천재적인 수완을 지닌 변호사 '펠리스(위 사진의 여성)'의 밀고 당기는 화법(話法)이다. 상대를 궁지 끝까지 몰았다가 느슨하게 공간을 내어주면서 본인이 원하고자 하는 진술을 의뢰인(아드리안)으로부터 차곡차곡 얻어낸다. 주인공 아드리안이 기억 속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압박하는 인물로, 영화 후반부까지도 <라쇼몽>처럼 하나의 사건이 관찰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인 건가..하고 생각했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이것이 오산이었음을 깨달았으니...
시놉시스가 워낙 치밀하고, 연출도 잘 이루어진 데다 스토리의 호흡도 적절해서 원작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감독 오리올 파울로 본인이 각본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카탈루냐 지방 일대가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표준 스페인어를 썼는데, 모처럼 듣는 스페인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톤이 듣기 좋았다.
끝으로.. 최근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움직임에 관한 기사를 틈틈이 보고 있는데, 유럽 전역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움직임―가령 독일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이라는 극우정당이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것 등등―이 확산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정체성의 단위가 국민국가이든 자치정부이든 말이다.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기원은 이사벨의 카스티야 왕국과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이 통합되었던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2014년 영국에서 이루어진 스코틀랜드 독립투표와 마찬가지로 투표 결과와는 별개로 후폭풍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비스케이 만에 자리잡은 바스크 지방의 분리독립 운동도 상당히 과격하게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라호이 총리에게 현 문제의 심각성은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독립이 부결된 스코틀랜드의 경우와 달리 카탈루냐에서는 (투표율이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찬성표가 90%를 웃도는 결과가 나왔고, 이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은 프랑코의 독재정권을 연상시키는 미숙한 대처(폭력)였다. 15세기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대승적 차원에서 스페인을 통합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스페인 사람들이 어떠한 지혜를 모을지 아니면 수렁으로 빠져들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각설하고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영화은 주된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말하되 '인간이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펠릭스가 다각적으로 사건을 파헤칠 수록, 등장인물 개개인의 인간성 또한 선명해진다. 달리 말해, 결백을 호소하던 아드리안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추악한 인간성을 한꺼풀씩 벗겨나가면서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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