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칸과 전쟁 : 물, 지뢰, 공 그리고 구호(救護)일상/film 2017. 9. 27. 00:03
<어 퍼펙트 데이/드라마/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맘브루(베니치오 델 토로), B(팀 로빈스), 소피(멜라니 티에리)/106>
소재가 독특한 영화다. 영화의 제목이나 포스터를 통해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는데, 다름 아닌 '구호활동'이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다. 비슷한 내용의 영화로는 이자벨 위페르가 종군기자로 열연을 펼쳤던, <라우더 댄 밤즈>와 소재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라우더 댄 밤즈>가 전쟁을 뒤쫓는 개인의 심리가 궁박해져가는 과정을 무겁게 그려나간다고 한다면, <어 퍼펙트 데이>는 각기 다른 캐릭터 일동이 전쟁에서 마주하는 상황과 그에 따른 역할을 그리 무겁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 무겁지 않다는 것'은 '살벌한 전쟁상황 속에서 인간적 해학을 담아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여러 캐릭터들이 비중있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러한 설정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먼저 장점을 꼽자면, 구호활동의 최전방에서 활약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오랜기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데에서 오는 외로움을 토로하거나, 실제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상부 지침에 주인공이 분통을 터뜨릴 때, 그들이 최전방에 뛰어들 용기를 갖춘 사람이기에 앞서 인간적 감성에 좌우되는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단점이라 한다면, 좌충우돌하는 캐릭터들을 한정된 시간 안에 담아내다보니 조금은 산만한 느낌이 있다는 점..정도다.
영화이 배경이 되는 곳은 발칸반도, 그 가운데에서도 알바니아 지역이다. 예전에 읽었던 발칸 역사서를 보면 오늘날 발칸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딘 것은 근대에 국민국가가 뒤늦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 형성이 요구되는 민족정체성을 갖추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지형적 요인으로 풀이된다. 발칸일대가 대중없이 산이 뻗어나간 지역이기 때문에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확고히 지배세력을 이룬 국가가 없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폴리스의 형성을 촉진시켰던 지리적 이점이 중세와 근대를 거치는 동안에는 유럽중심부의 정치문화와 결을 달리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기독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매우 복잡한 곳이다. 영화의 주무대인 알바니아만 해도 발칸반도에서 외딴 섬처럼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국가다. 문제는 근대로 넘어오면서 국경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을 때, 발칸지역 개개인의 종교적 성향이 반영되기 어려울 만큼 종교가 편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이용해 세르비아는 국민국가 설립 과정에서 인종청소에 나섰고, 알바니아에 접한 코소보 지역이 분쟁지역으로 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영화에도 이러한 대치상황과 끝을 알 수 없는 복수전이 잘 묘사되어 있다.
각설하고 발칸반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산'은 영화에 매우 잘 그려져 있다. 구호 차량이 절벽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는데, 매우 기괴한 산등성이와 그 너머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냥 평화로운 지역인 것 같만 같다. 드문드문 자라나는 풀들은 프로방스나 알프스의 초원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몇 가지(전쟁의 대물림, 폭력의 일상화, 구호 활동가들의 고충 등등)로 추려낼 수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이론과 실제의 괴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여기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행동대장'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식수 부족에 처한 마을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에 고민하고 착수한다. 그러나 행정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UN의 철옹성 같은 활동정지 명령에, 그들은 목표 완수를 눈앞에 두고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국제개발협력(ODA)을 두 학기 넘게 공부(?라기엔 거창하지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다뤘던 케이스들도 대체로 이러한 한계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원조 공여국'과 '원조 수혜국'이 서로 바라는 점이 다르다보니, 이상과 실제의 괴리가 커지고 원조가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국제개발협력'이라는 것이 과연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니냐는 비판에 봉착한 것이다. 그 이후에 등장한 것이 임파워먼트를 통해 구호를 필요로 하는 국가가 자력으로 갱생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자는 논의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미 소수의 선진국이 선점한 경제, 정치 및 사회 시스템에서 후발주자인 빈곤국들이 과연 어떤 먹잇감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느는 구조적 차원의 질문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모든 것에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원조나 구호활동은 흔치 않을 뿐더러, 그러한 선의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구호활동이나 원조에 조건을 달거나(이를 국제개발협력에서는 '구속원조'로 표현하기도 한다), 국제기구에서 제시한 기준을 따르다 정작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후원단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구호활동'과 '원조'도 엄밀히 말해 같은 의미가 아니임에도 혼용해서 썼지만(가령 '구호'라는 것은 국경없는 의사회와 같은 비정부기구에 보다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활동가들이 지니는 사명감과 현실에 차이가 크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 그런 점에서 자생적으로 조직을 꾸려 매우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누비는 시리아의 '하얀 헬멧들' 조명을 받는 것은, 그들이 기존의 구호활동과 다른 민첩한 대응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만큼 남다른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베니치오 델 토로 아니겠는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카리스마가 쏟아지는 걸 보면 우리나라 배우 중 김윤석이 떠오른다. 여하간 뜬금없이 잡다한 이야기로 샜는데, 대단한 울림이 있는 영화는 아니었지만(특히 맘브루의 여자친구가 굳이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음-_-;;), 색다른 소재를 다룬 영화라 저들의 고군분투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20세기 (0) 2017.10.11 보이지 않는 손님 (0) 2017.10.04 마일즈(Miles) (0) 2017.09.19 넥스트 네오도쿄(Neo-Tokyo) (0) 2017.09.17 그것은 두려움이었으니 (0) 2017.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