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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저편(La face cachée de la lune)주제 있는 글/Théâtre。 2018. 5. 25. 20:20
달의 저편(Far side of the Moon), 로베르 르빠주(Robert Lepage)
1. 달의 이면(裏面), 인간의 내면(內面)
"지구는 인간의 요람이다. 하지만 인간은 요람에서 평생을 보내서는 안 된다" 스푸트니크의 발사 이후 인류는 지구라는 준거점을 벗어나 지구 밖에서 자신의 자아(自我)를 찾기 위해 훨씬 고독한 여정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한나 아렌트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인간에게 달은 신묘한 존재다.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이 늑대로 변신한다는 서양의 설화나 구미호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우리의 설화나 달에 관한 인식에는 일관된 면이 있다. 미지(未知)의 것,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것, 때로는 불길함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 소련이 우주에 쏘아 올린 탐사선이 달 반대편의 이미지를 송출해왔을 때, 일그러진 달의 이면을 보고 사람들은 아연실색한다. 사실 우주에 발사체를 쏘아올린다는 발상이 있기 전까지, 인간이 달의 이면에 대해 생각, 아니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을까. 달은 지구를 일정하게 바라보며 공전하고, 지구의 밤하늘에서 올려다본 달의 모습은 한결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달의 이면을 두 눈으로 확인함과 동시에 어떤 불편한 마음과 혼란스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지상최고의 동물이라 자부하는 인간은 정말로 훌륭한 존재일까. 우리가 두 발 딛고 살아가던 지구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라면, 우리가 봐오던 달의 정면이 달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지? 우리의 역사는 우주 전체로 보았을 때 찰나에 불과한 스쳐감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지?
인간은 기술의 진보와 함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세상을 누빌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더 왜소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주로 쏘아올린 단 한 대의 탐사선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경외심, 소외감, 정체성의 혼란, 이것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이 연극은 바로 그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2. 별을 여행하는 자(Astronaut)와 우주를 여행하는 자(Cosmonaut)
주인공은 소련에 도착한 뒤 어느 바에서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Astronaut는 별을 탐사하는 사람을 말하는 반면 Cosmonaut는 우주를 탐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때 코스모스(cosmos)는 조화로운 체계 또는 구조로서 케이오스(chaos)의 반대의미로 사용된다. 더 나아가 필립은 Astronaut를 비꼰다. 별을 탐사하기 위해 펀딩을 잘 받아오는 사람을 우주비행사(astronaut)라 일컫는다며.
Astronaut와 Cosmonaut의 구분은 결국 필립과 그의 동생 앙드레의 관계로 귀착된다. 이 둘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 까닭에 오랜 만에 연락을 취했지만, 그동안 견원지간으로 지냈던 형제다. 동생은 전형적인 Astronaut로서 기상캐스터로 출세하고 속물근성이 강하다. 반면 형 필립은 호기심이 많고 학구적이지만 자신의 연구성과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한 철학자로서 Cosmonaut라 할 수 있다. 앙드레의 관점에서 형이 살아가는 방식은 한심하기 짝이 없고, 필립의 파고드는 관심사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해괴망측한 것일 뿐이다. 반면 필립의 관점에서 앙드레는 비록 금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바라보는 세계란 기상도(氣像圖)로 내려다보는 푸른 지구가 전부인 근시안적 인물이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가지만, 작가는 기승전결의 구도로 이러한 긴장을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작가로서 로베르 르빠주는 한국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이러한 두 형제의 관계가―더불어 연극이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는 미소 냉전기가―현재 남북분단 상황에 놓인 한반도의 갈등상황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인터뷰 한 바 있다.
밤하늘의 별은 서로 무관한 위치에서 자신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립은 어느 순간 말한다. 별들에게도 혈연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하루는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붉은 달을 보았는데 자신의 혈연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3. 금붕어와 베토벤
로베르 르빠주는 연극에서 일상적인 소재를 많이 활용한다. 세탁기나 다리미가 대표적이다. 세탁기의 투입구는 주인공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설정은 언뜻 너무 개연성이 없어보이지만,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고뇌하고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극의 의미전달은 자연스러워진다.
또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것이 어항에서 줄곧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는 다홍색 금붕어, 베토벤이다. 어머니의 집에서 키워오던 이 금붕어는 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서, 비록 무대의 전면은 아니지만 연극 내내 무대의 한 편을 차지하는 미장센이다. 베토벤에게 어항은 자신이 아는 세계이 전부이며 어항밖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물론 어항 안에서도 어항 밖의 상황이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귀를 닫고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이미지마저 안겨준다. (물론 금붕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생물체도 아니고, 베토벤은 음악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학술발표를 위해 며칠간 집을 비운 사이 어항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베토벤은 죽고 만다. 자신의 거처를 떠난 베토벤이 맞이한 운명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더 넓은 우주에 도전하고자 하는 인류의 의지에 대한 회의? 어항 속에 갇혀 있더라도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살 때가 차라리 속 편하다는 것? 그러나 실존했던 베토벤은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초월해 인류를 감동시킬 만한 곡을 쓰지 않았는가. 극 종반주에 월광소나타가 울려퍼지며 인류의 고독한 여정에 대해 생각케 한다.
4. 소통 : 너와 나의 연결고리
끝끝내 필립은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그가 시험삼아 응모했던 프로젝트에 선정된다. 바로 외계생명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필립의 레코딩이 낙점된 것. 필립은 자신의 의견을, 자신의 목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쓸쓸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기회로 그는 그 누구보다도 넓은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쏘아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를 동생 앙드레라고 어찌 격려해주지 않으랴.
5. 마치며
가끔 생각한다. 하루에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어떻게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분명 우리의 세계는 기술적으로 발전했고, 물리적으로 윤택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엄청난 진보를 이룬 것은 아니다. 기술의 발전속도만큼 뇌용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도 아니고, 멀티태스킹을 하기 위해 눈과 귀가 한 쌍씩 더 생긴 것도 아니다. 온갖 기술과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주인이 아닌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필립의 실존적인 고뇌가 유달리 공감되었던 까닭은, 그가 느끼는 외로움이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결국 우리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단지 기술과 과학의 발전만이 진보가 아니라는 것, 풍요로움 속에서도 빈곤과 분쟁, 갈등은 여전하다는 것, 그러므로 인류의 성찰이 절실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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