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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조련사(The Great Tamer)주제 있는 글/Théâtre。 2017. 10. 3. 01:17
<위대한 조련사(The Great Tamer)/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무명#1(칼리오피 시모우), 무명#2(크리스토스 스트리노폴로스)~무명#10>
아주 오랜만에 연극을 봤다. 매년 가을에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종종 가곤 하는데, 작년에는 가지 못하고 올해 공연 소식을 듣고 대학로로 발걸음을 했다. 할인이 적용되는 사전 예매가 공연 개최 2개월쯤 전부터 시작되지만, 항상 정보를 놓치고 9월 즈음이 되어서야 연극 정보를 찾아보게 된다. 그러면 당연하게도 남는 자리가 몇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아 있는 좌석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 공연제는 해마다 성황인데, 그만큼 재미있고 신선한 연극이 많이 진행된다.
(참고로 이 글은 내 느낌을 중심으로 서술하되, 일부 「Play to See」라는 매체에서 마리아나 파파키(Mariana Papaki)의 리뷰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스탠리 큐브릭 作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한 장면
Motive#1. Stanley Kubrick
이 연극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폐막식에서 총예술감독을 맡았던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작품으로, 그리스 연출가로는 처음으로 해외공동제작 아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공연 시작 20분 전부터 공연장에 입장할 수 있었는데, 이미 무대 위에는 웬 남성 한 명이 한 켤레의 구두를 옆에 두고 누워 있는 상태였다. 무대는 어두운 회색 널빤지가 불규칙적으로 가로놓여 있는데, 울퉁불퉁한 표면이 척박한 땅을 연상시켰다. 공연 시각이 다가올 수록 모든 좌석이 만원을 이루었고, 공연 시작까지 5분쯤 남았을까 이내 무대 위 남성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옷맵시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맵시가 갖춰지자 모든 동작을 멈추고서는 좌우로 시선을 옮기며 좌중을 강렬하게 응시한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함으로써 관객들을 압도하려는 듯이.
공연 시각을 넘겼다는 걸 깨달을 즈음,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삽입된 ost로도 잘 알려진 요한 스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다. (개인적으로는 롤러코스터 타이쿤의 회전목마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로 더 기억에 남지만..=_=) 편곡된 <푸른 도나우>는 매우 느릿느릿하게 끊어질듯 이어지며 가락을 유지한다. 실제로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연극에는 두 명의 우주인이 등장하고 이 대목에서 잿빛 무대는 미지의 혹성처럼 묘사된다.
유영(游泳)하듯 무대 위에 등장한 우주인은 무대 중앙에서 땅을 파헤치더니, 무대 밑에서 나신의 남성을 끌어올린다. 이건 지나친 추측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스탠리 큐브릭에게서 영감을 빌려온 듯한 장면이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땅위로 꺼내 올려진 남성이 '오렌지'를 까기 시작하는 것. 그러고는 껍질을 다 벗긴 오렌지를 '성경'으로 보이는 커다란 책 위에 올려 놓는다. 영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 또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 아닌가 싶다. 워낙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연극이라,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인 것 같다.
프랜시스 베이컨 作
렘브란트 作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Motive#2. Anatomy or Dissemination
마리아나 파파키는 연극의 특정 장면이 렘브란트의 작품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는데,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오히려 프랜시스 베이컨의 예술작품들이 더욱 많이 연상되었다. 마리아나 파파키가 말하는 장면은 아마도, 나신의 남성을 거치대로 옮긴 뒤 야만스럽게 장기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장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또는 육체 안에 갇혀버린 정신―을 파격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한다. 그런 마디마디들이 프랜시스 베이컨이 생전에 그리고자 한 예술세계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육체를 지워냈다, 해체했다, 결합시키는 기법은 연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연출법이다. 가령 켄타우로스를 형상화한 등장인물이 몸통과 다리 두 짝으로 분리되는 장면, 군데군데 떨어져 있던 신체조직들이 결합하는 장면, 사람의 육체가 부분적으로 모여 형이상학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면 등등 기발한 이미지와 비유가 넘쳐난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장면은 사람의 팔이 용수철 소재의 철골로 연결된 장면이다. 배우의 현대무용에 맞추어, 스프링은 자체의 탄성으로 오묘하게 움직임을 바꾼다. 현대무용의 기발함과 철의 이질감이 엮여 멋있기도 하고 이채롭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기괴한 배우들의 움직임과 협동은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선하고 파격적인 접근법에서 몸을 해석하는 장면을 예의주시하면, 육체라는 물질이 지닌 유한함, 그 안에 꿈틀대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를 읽어낼 수 있는 듯하다.
보티첼리 作 <비너스의 탄생>
Motive#3. Sarcasm
기왕에 주관적인 의견을 다 풀어놓자면, 나는 이 연극을 통해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디미트리스의 연극에서 관조(觀照)의 대상은 관습적인 의미의 '미녀' 대신 남성인 듯하다. 특히 극 중의 한 부분은 묘하게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리게 했는데, 차이점이라면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수줍게 서 있는 주인공이 '비너스'가 아니라 '땅에서 끌어올려진 나신의 남성'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미를 부각시키며 르네상스의 첨단을 연 이 작품에서 성별을 비꼰다는 역발상이 대담하게 느껴진다.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시킨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비너스를 대신한 남성 뿐만이 아니다. 헐벗은 남성을 둘러싸고 세 명의 여인이 집요하게 남성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이들은 검은색 기본옷차림에 거적대기를 두르고 있다. 그 모습이 꼭 마녀 같은 데다 등장한 인물이 세 명이어서 그런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세 마녀가 떠오르기도 한다. 때문에 이 장면의 분위기는 <비너스의 탄생>과 사뭇 다르다. 화사한 느낌을 풍기는 <비너스의 탄생>과 달리, 이 장면의 느낌은 음험한 느낌마저 풍긴다. 기존에 남성이 여성을 관조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관조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해 해석을 시도할 수 있었던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곡물과 수확의 여신 '데메테르' 그리고 '켄타우로스'
Motive#4. Greek Mythology
연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적인 요소다. 서양 희곡의 기원을 이루는 아테네의 고장답게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는 연극 곳곳에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한 모티브들을 심어 놓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장 차림의 남성들 사이를 가로질러 무대 중앙으로 당당히 걸어나오는 '켄타우로스'다. 하반신은 두 명의 남자 배우가 지탱하고, 상반신은 반라의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데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 머리 위에 화분을 이고 무대 왼편에서 걸어내려오는 '데메테르'다―연극을 종합해서 볼 때 개인적으로 '데메테르'가 가장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베이지톤의 가운 복장을 입은 여신이 뿌리와 흙을 캐는가 하면 물을 길어 올리거나 한다. 연극의 말미에는 시커먼 무대가 누런 곡물로 뒤덮이는 장관이 연출되는데 이 또한 수확과 관련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연극 도중 이 여신은 태양 형상의 광배(光背)를 머리에 입음으로써 잠시 컨셉을 바꾸는데, 이 때만큼은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구둣바닥에 자라난 뿌리를 박차고 물구나무를 서서 이동하는 장면 또한 데메테르가 일궈 놓은 '토양'과 이로부터 이탈하는 '일종의 '탈(脫)관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꿈보다 태몽인 걸까, 정말 상징과 비유가 차고 흘러넘친다.
Motive#5. Sisyphus Myth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따로 떼어 언급하고 싶은 것이 '시지프스 신화'다. 나는 대학 시절 현대철학 강의에서 알베르 카뮈를 통해 처음으로 시지프스 신화를 접했는데, 이 주제를 따로 다루는 이유는 연극을 감상하는 내내 가장 많이 연상되었던 것이 바로 '시지프스 신화'이기 때문이다.
구(球) 모양의 지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직관적으로 '아틀라스'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힘겹게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와 달리 곡예하듯 구 위에서 아슬아슬 중심을 잡는 배우들의 모습 또한 일종의 역발상이다'a')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의 신화를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동작들을 연극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시지프스가 수행했던 고행(苦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장차림의 남성이 무대 오른편에서 옷을 순서대로 벗었다 입었다 하는 장면, 수평으로 마주본 남성이 상하대칭으로 허공에서 연기하는 장면, 구두의 위치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이 장면은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연상시켰다'ㅁ'), 반복적으로 천을 덮었다 젖혔다 하는 장면 등등이 그러하다. 마치 스스로 거부할 수 없는 형벌에 갇힌 사람처럼 무의미한 동작들을 반복하고, 이 굴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관된 형식 안에서 육체들이 운반되었다 사라지고, 해체되었다 결합되는 모습들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일종의 '덧없음'을 발견한다. '덧없음을 위해 기를 쓰고 형벌을 수행하는 시지프스'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모든 덧없는 것들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 우리의 삶도 이런 것이 아닐까.
The Great Tamer
그밖에도 인상적인 장면은 참 많다. 아버지로 설정된 배우가 석고로 범벅이 된 아들이 석고껍질에서 나오도록 돕는 장면(연출기법이 참 기발하다), 후반부에 겹겹이 몸을 포갠 남성배우들이 마치 번데기 껍질에서 빠져나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연기하는 장면(연출기법이 더 기발하다;;) 등등, 파격적이면서도 미적(美的)인 장면들이 많았다. 이 두 장면만큼은 또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라는 <데미안>의 명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무리하게 읽어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다양한 상징들이 중첩되어 있는 작품이다.
글을 쓰다보니 어떤 결론에 이르기보다는 다시 초보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간 나 자신을 발견했다. 글을 쓰면서 느낀 궁금증은 '그래서 왜 제목이 <위대한 조련사>인가'하는 점이다. 연극에는 '길들이는 자'와 '길들여지는 자'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다. 딱히 '조련'이라 꼬집어 표현할 만한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냥 조련사도 아닌 '위대한 조련사'라니..
오히려 이 연극은 일체의 '길들여짐'을 거부하는 연극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대한 조련사'라고 명명한 것이 아닐까. 제목에서 기대했던 내용과 다른 주제를 마주했을 때 관객이 느낄 어색함, 당혹감, 그리고 이러한 혼란이 가라앉았을 때 관객들이 여유를 갖고 반추(反芻)하게 될 연극의 본래 주제. 이것이 디미트리스 파파오이아누가 노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 조련되어온 우리의 고정된 사고의 틀을 깨려는 것이 이 연극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야말로 사소한 소품에서부터 이야기의 표현방법에 이르기까지 참신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연극이었다. (비록 넘치는 참신함 때문에 개연성이 낮아진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하나로써 완결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본다면, 잘 매듭지어진 연극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훌륭한 연극이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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