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삶/알랭 바디우/글항아리>
만일 권력의 일부를 보장받을 차례가 주어지는 자들에게서 이 권력이 제시하는 삶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이 있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떤 참된 정치 공동체가 실존할 가능성을 얻게 될 거야. 왜냐하면 돈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필요한 무언가를 부유함으로 여기는 자들만이 권력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 참된 삶이, 풍부한 사유로 가득한 그런 삶이 부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만이 말이야. 반대로 개인적 이득에 굶주린 자들이, 권력은 언제나 실족과 사유화된 재산의 확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자들이 공적인 일에 달려든다면, 어떠한 참된 정치 공동체도 가능하지 않겠지. 이런 자들은 항상 권력을 얻으려고 서로 싸우며, 이 투쟁은 사적인 열정과 공적인 권력을 뒤섞어서 최상위의 역할을 노리는 찬탈자들로 국가 전체를 망가뜨린단 말이야.
p.15
철학, 그것의 주제는 바로 참된 삶이다.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철학자의 독자적인 질문이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의 타락이 있다면, 이는 결코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바로 참된 삶이 있음을 말이다. 그것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살아갈 보람이 있는, 그리고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훨씬 능가하는 무엇이다.
p. 17
본질적으로, 우리는 젊은 시절에 보통 명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때로 혼합적이며 모순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실존의 두 가지 가능적 방향에 사로잡힌다. 이 두 경향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불사르는 열정과 삶을 쌓아올리는 열정으로 말이다. 삶을 불사르는 것, 그것은 즉각성에 대한 허무주의적 숭배를 의미한다.
p. 21
J'avais vingt ans. Je ne laisserai personne dire que c'est le pus bel âge de la vie.
p. 23
오늘날 노년 중시는 사라지고 반대로 젊음을 중시하는 쪽으로 기운다. 그것이 바로 '청춘지상주의'라고 불렀던 무엇이다. 청춘지상주의는 지혜로 가득한 늙은이들에 대한 오래된 숭배를 뒤집는 역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 사회에 관해 예견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모델이 어른 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젊음을 유지하기 바라는 늙은이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p. 30
젊다는 사실이 더 이상 입문의례 형태로 젊은이와 어른을 나누는 사회적인 표시 작업에 종속되지 않으며, 따라서 성장기(젊음)와 성인기 사이의 전이가 한층 유연해졌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젊은이들이 의례나 관습에 관해 어느 정도는 더 동질적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 요컨대 그들의 '숭배'에 관해서 말이다. 우리는 결국 노년기에 대한 정신적 숭배가 젊은이들에 대한 한없는 물질적 숭배로 뒤집어졌다고 단언할 수 있다.
p. 33
입문의례가 없다는 사실은 이중적 의미로 주어진 소여donnée다. 한편으로 이는 젊은이들을 일종의 사춘기adolescene에 노출시키며, 따라서 내가 이야기한 열정들을 다룰 수 없는, 이 열정들을 규제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 노출시킨다. 그리고 이는 또한 성인의 유소년화puérilisation라 부를 수 있을 무언가를 초래한다. 어린애처럼 만들기infantilisation를 말이다. 또 한편으로 젊은이는 무한정 젊은 채로 남는데, 왜냐하면 특정한 표식이 없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성인기가 연속적인 동시에 부분적인 방식으로 유년기의 연장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인의 유아화는 시장의 힘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세계 내에서, 삶이란 부분적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 무언가를, 결국 장난감을 살 수 있는, 큰 장난감을, 우리를 흡족하게 하고 타인에게 강한 인상을 줄 물건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p. 34~35
근대성, 그것은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것은 카스트(계급)로, 곧 귀족과 세습군주, 종교적 의무와 젊은이들의 입문의례, 여성의 복종, 힘 있는 자들과 무시당하며 힘겨운 삶을 사는 농부나 노동자나 떠돌이들의 대중 사이에 엄격하면서도 형식화된 공식적 분리가 인정되던 오래된 세계의 종언이다. 그 무엇도 이 저항할 수 없는 운동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서구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되었고, 이데올로기적 층위에서 18세기 계몽사상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그 이후 전대미문의 기술적 비상과 계산·유통·통신 수단의 끊임없는 개량으로 물질화되고, 19세기 이래 세계화의 도상에 있던 자본주의 그리고 암중모색과 끔찍한 실패와 끈질긴 재건을 거치는 집산주의적 공산주의 이념 간의 정치적 전투에 회부되는 이 운동을 말이다.
p. 41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팽창 중에 있고, 그 고유한 발전 양식은 줄곧 위기와 전쟁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또한 경쟁의 형태들을 제거하고 승자의 입장을, 다시 말해 모든 타자를 무너뜨려서라도 자기 손안에 가용한 자본을 최대한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자들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야만적인 수단들을 내포하고 있다.
p. 43
이 진정한 모순, 곧 사유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모순은 위계화를 수반한 상징적 전통에서의 필연적인 이탈에 관한 두 가지 전망을 대립시키는 그러한 모순이다. 즉, 서구 자본주의의 상징 없는 전망―괴물스러운 불평등과 병인적인 방황을 낳았던―과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라 명명되는 전망―마르크스와 그의 동시대인들 이래 평등주의적 상징화를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이 대립되는 모순 말이다.
p. 52
주체로서의 여러분은 결코 자기 집을 단단히 지어올림으로써 실현되지 않으며, 따라서 주체는 그 자신을 향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이란 그저 오래된 집일 뿐이며, 방황의 횡단은 그 집에 어떤 새로운 긍정을 만들어낸다.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자리에 관해 하나의 새로운 상징화를 얻게 된다. 참된 집은 사유와 행위의 모험으로 여러분이 집을 떠나서 거의 잊어버릴 쯤에야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머무는 집은 단지 자발적인 감옥일 따름이다.
p. 60
'젊은이들의 집단'은 어떤 특정한 의미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리를 재생하며, 이런 측면에서 사회적 우주의 재앙으로 고려된다. 문제는 명확하게 아버지 없는 무리와 관련되고, 따라서 구원적인 살해나 형제들 간의 기원적인 협약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아버지를 향해 공격성을 돌리는 행위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인정되는 협약이 아니라 모방적인 분리로부터 그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 집단은 독자적이며 그 자체의 규범을 갖지만, 이 분리는 또한 분명한 정체성과 유사성이기도 한데, 그것이 무한한 교환, 구매, 그리고 결국 거래의 윤곽에서 시장의 대상들의 유통을 관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집단은 일종의 움직이지 않는 방랑생활 외에 다른 것을 구축하지 않는다. 그 공격성, 곧 이 무리가 구성될 때 나타나는 공격성은 여기에서 운율에 따른 구획이 없으며, 그것은 정초적 행위로 응축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정초적이지 않은 공격성이란 반복에 바쳐질 뿐이기에, 결국 죽음충동에 의해 지배된다.
p. 74
아들과 어른의, 아들들과 부모들의, 아들과 아버지의 화해는 오로지 어른의 유아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화해는 실천 가능하지만, 단지 뒤집힌 방식으로 가능할 뿐이다. 원시 기독교 신화에는 아들의 승천이 있었다.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아버지들의 하강을 경험하는 과정 이상이 아니다.
p. 78
아들이 이념 없이 살게 된다면 사유가 성숙해짐mûrissement을 견뎌내지 못했던 탓이라 하겠다. 이에 반해 딸이 이념 없이 살게 된다면 너무 조속히 그리고 매개 없이 헛된 만큼이나 야심적인 성숙함maturité을 유지했던 탓이다. 소년(아들)은 남자의 결핍으로 이념을 결여하며, 딸은 여자의 과잉으로 이념을 결여한다.
p. 111
이 지점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동시대의 자본주의적 사회들이 결국 그 자체가 만들어낸 이 문제와 타협한다고. 나의 정세 전망은, 아직 매우 모호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형상들의 종말을 수용하는 동시에 자본의 예비군으로 간주되는 여성-일자의 형상을 기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하녀, 유혹하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성녀라는 네 가지 형상으로 구성된 상상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원환에서 빠져나가며, 대개 이미 빠져나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 주 ㅇ다수는 이 부정적 자유데 따라 자본에 속한 여성-일자의 모순적 운명을 결코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자들은 이 동시대적 형상이 추상적인 예속의 단일성을 위해 둘의 자원을 폐지함을 안다. 그녀들은 그런 이상 모성이 강한 상징화들에서 뿌리 뽑혀 환원 불가능한 하녀 상태로, 영광 없는 창조로 존속함을 안다.
p. 127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0) 2018.10.15 불안의 책 (0) 2018.10.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게르망트쪽 II (0) 2018.09.22 유럽의 그림자 (0) 2018.09.21 인도사 (0) 2018.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