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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페르난두 페소아/문학동네>
죽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죽음이란 길을 떠나는 일 같다고 생각한다. 시체는 그가 떠나면서 남긴 옷과도 같다. 누군가 떠났고 그동안 입고 있던 유일한 겉옷은 그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p. 57(40)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파괴했다. 이해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잊는 것이다. 나는 어떤 대상을 이해한 후에야 그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고 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언만큼 거짓인 동시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알지 못한다. 고독은 나를 황폐하게 만들고, 동행은 나를 억압한다.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생각이 방향을 잃는다. 모든 분석력을 동원해도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방심 상태에서 곁에 있는 존재에 대해 꿈꾸기 때문이다.
p. 66(48)
나는 내 마음속에 다 그려지지 않은 몸짓들과, 내 입술에 올릴 생각조차 못했던 말들과, 끝까지 꿈꾸지 못하고 잊어버린 꿈들이 담긴 우물이다. 나는 누군가 건물을 짓는 도중에 무엇을 지으려 했는지 생각하다 지쳐버려 결국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폐허다.
p.87(61)
내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마음 깊이 절실히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낌을 가지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생각을 가지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느끼는 것이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게 살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느끼는 것은 생각을 키우는 양식일 뿐이다.
p. 100(71)
내 슬픔을 합리화한다고? 합리화도 일종의 노력이거늘 무엇 때문에 그리할까? 슬픈 사람은 아무런 노력도 할 수 없다. 내가 몹시도 혐오하는 삶이지만, 삶의 사소한 행동들조차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도 노력인데, 내게는 노력하는 인간의 영혼이 없다
p. 112(80)
행동하는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사고하는 인간에게 종속된다. 모든 일들의 가치는 해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사는 것은 살아지는 것일 뿐,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p. 213(163)
우연히 목격했던 노동자들의 시위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이러니한 슬픔을 느낀다. 그들의 시위가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들은 모였다 흩어지곤 하는 어리석고 떠들썩한 인간 집단이었다. 나는 그들이 여러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는 모습을 타인의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구토감이 올라왔다. 심지어 그들은 그다지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고통받는 자들은 떼로 모이거나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자는 홀로 고통스러워한다.
p. 214~215(165)
우리가 노예라는 사실은 도망칠 수 없고, 반항할 수 없고, 따를 수밖에 없는 삶의 유일한 법칙이다. 어떤 이들은 노예로 태어나고, 어떤 이들은 노예가 되고, 어떤 이들은 노예로 있기를 강요받는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비겁한 사랑―자유를 준다 해도 낯설어 거부할 게 틀림없는―은 우리의 노예근성이 얼마나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징표다.
p. 218(167)
그리고 나는 겁을 먹은 채 삶을 증오하고, 매혹에 빠진 채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다른 뭔가 될 수 있는 무無가 두렵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無가 두렵다. 마치 거기에 끔찍한 공포와 공허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나의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호흡이 관 안에서 멈춰버리는 것처럼, 그 안에 불멸성이 갇혀 산산조각나는 것처럼 두렵다.
p. 219(168)
우리 세대가 태어난 세상은 두뇌와 심장을 겸비한 이들을 더이상 인정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전 세대가 저지른 파괴 행위의 결과, 우리가 태어난 세상은 종교적으로 불안전하고 도덕적으로 혼란하고 정치적으로 무질서했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고민과 도덕적 근심과 정치적 불안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다. 객관적인 형식, 그리고 이성과 과학에 경도된 방법론에 도취된 이전 세대들은 텍스트 비판에서 시작해 신화 비판으로 이어지는 성경 비판을 통해, 유대교의 초기 경전과 복음서를 한 더미의 의심스러운 신화, 전설, 문학들로 격하시켰다. 그들은 과학적인 비판을 통해 복음서 속 원시적 '과학'의 순진한 개념과 실수들을 드러냈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반을 허물어뜨렸다. 그러는 동시에 자유 토론의 정신으로 모든 형이상학 문제를 열린 광장에 풀어놓음으로써 형이상학과 관련있는 종교 문제들까지도 토론 광장으로 끌어냈다. '실증주의'라고 불리는 불확실한 개념에 도취된 그들은 모든 도덕성을 비판하고, 인생의 모든 규칙을 샅샅이 탐구하며 갖가지 강령들과 부딪쳤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이것마저도 확실하지 않다는 데서 생겨난 아픔이었다. 문화적 기반을 갖춘 규율이 확립되지 못한 사회는 정치적으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우리가 태어난 세상은 사회 혁신을 갈망하는 한편, 알 수 없는 자유와 모호한 발전을 지향하며 들떠 있는 곳이었다.
p. 229(175)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 삶을 하루 더 사는 것은 바로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p. 233(178)
생각하는 것은 곧 파괴하는 것이다. 생각 자체가 생각의 과정을 통해 파괴되는데,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은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삶의 불가사의를 명상하고, 미세한 행동 하나하나마다 영혼을 염탐하는 수천가지 복잡함을 느낀다면 아마 다시는 행동하려 들지 않고 아예 삶을 포기할 것이다.
p. 244(188)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고 우리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감정들은 실상 터무니없는 것들이다. 오로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품게 되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일에 대한 아쉬움, 누군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비탄, 이 세상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어중간한 의식은 우리 안에 쓰라린 풍경을 만들고 우리를 영원한 황혼녘으로 만든다. 그럴 때면 우리 자신이, 넓은 강둑 사이에서 강물이 검게 반짝이고 배가 지나가지 않는 강가의 갈대들만 서글프게 어두워져가는 황무지처럼 느껴진다.
p. 252(196)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면, 즉 돈이나 친교, 또는 사랑이나 명예, 호기심 등, 조용히 혼자서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들을 하결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찾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을 자유롭다. 만일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고귀한 영혼과 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귀족적인 노예, 지적인 노예일 뿐이고 결코 자유롭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났다면 당신의 비극이 아니라 '운명' 자체의 비극이다. 하지만 삶이 당신에게 노예가 되도록 강요한다면, 당신은 불운하다. 홀로 충분히 살 수 있고 고립되어 살 수 있도록 자유롭게 태어난 당신인데 가난이 당신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강요한다면, 당신은 불운하다. 이 경우 비극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을 따라 다닌다.
p. 361(283)
우리는 원래 있던 것을 잃었고, 다른 모든 것도 잃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외롭다는 느낌에 싸인 채 홀로 남았다. 배의 존재 이유는 항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항해가 아니라 항구에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착해야 할 항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항해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러다보니 사는 건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항해가 전부라는 선원들의 모험적인 수칙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
p. 386
예술은 왜 아름다운가? 쓸모없기에 아름답다. 삶은 왜 흉측한가? 온통 목적과 목표와 의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흉측하다. 인생의 모든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장소와 아무도 도달하지 않는 장소 사이에 길이 주어진다면!
p. 413
권태는 혼돈을 느끼는 육체적 감각이고 모든 것이 다 혼돈이라는 느낌이다. 지루한 사람, 불쾌한 사람, 피곤한 사람은 자신이 좁은 감옥 안에 갇힌 죄수인 것처럼 느낀다. 인생의 협소함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은 자신이 커다란 감방 안에서 수감을 차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권태로운 사람은 무한한 감옥에서 아무 소용 없는 자유에 감금되어 있다고 느낀다.
p. 471
대중은 결코 인도주의적이지 않다. 대중이라는 집단의 근본 특징은 자신의 이익에만 편협한 관심을 쏟고, 타인의 이익에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대중이 저농을 잃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사회적 유대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사회적 유대가 끊어졌다는 것은 소수집단과 대중의 사회적 유대가 단절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소수집단과 대중의 유대가 끊어지면 예술과 진정한 과학이 끝장나고, 문명을 만든 기본제도도 종말을 맞는다.
p. 482(392)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쩌면 다른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무라는 것은 모든 것의 공존이다. 이것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저 램프가 아무 의미 없이 허울만 그럴듯한 높은 곳 어딘가에서 불을 밝히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이 방식, 즉 현존하는 의식을 갖고, 의식하고 현존하기에 지금 이 순간 온전하게 나인 바로 이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밤과 침묵의 한 자락, 내가 이 밤과 침묵과 나누는 공허와 부정적 성향과 중간성, 나와 내 자아 사이에 벌어진 틈, 신들이 망각한 어떤 것, 모두 아무것도 아니다.
p. 541(441)
이 책은 얼마 전 읽었던 로버트 캐플란의 <유럽의 그림자>에서 소개되었던 것을 계기로 읽었다. 약 450 여개의 짧은 글을 모아놓은 산문집으로, 처음에는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싶었다. 삶의 덧없음에 대해 파고드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이 참 유려하다고도 생각했지만―아마 포르투갈어 원문은 시적인 운율까지 살려 훨씬 훨씬 유려하지 않을까 싶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이 매우 자전적이면서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페소아의 뛰어난 비유 때문이다. 비슷한 듯 다른 글귀들 사이에서 그가 또빡또박 적어내려간 어떤 글귀들은 마음을 훅 후벼파고 들어왔다. 책의 후반으로 가면서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내가 또 다른 페르난두 페소아일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때로는 삶에 환멸을 느끼고 때로는 권태를 느끼며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었으니까.
가을이라 마음도 허한데 이 책을 며칠간 붙잡고 있었더니 더욱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 같다. 이럴 때는 가끔 내가 좋아하는 일본어 단어 '헤챠라(平ちゃら:아무렇지 않은 듯 기운있는 모양)’가 떠오르곤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격하시켰던 '보통 사람'도 되기 쉽지 않은 요즈음, 정의내릴 수 없는 시대에 툭 던져졌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며 기운내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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