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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일상/book 2018. 10. 15. 23:16
<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 테리 이글턴 / 갈마바람>
몸의 비개인성을 감안할 때, 몸은 자아에게 낯설고 외적인 존재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원론은 어떤 의미에서 납득할 만한 오류다. 이원론자들의 오류는 인간을 자기 분열적 존재로 보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의 오류는 단지 이 균열의 본성을 잘못 파악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공간을 차지한 몸과 영혼이라는 에테르적인 항목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개체화하거나 정신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낀다 하더라도, 그런 경험을 하는 자아는 체화된 현상이다. 자신의 살이 낯설고 외적이라는 느낌은 실제로 '영혼'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때 영혼이란 유기체로서 사람의 유의미한 삶을 뜻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불화하는 것은 몸과 영혼이 서로 불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적이고 창조적이며 개방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영혼을 거론하는 것은 의미작용의 능력을 보유한 몸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작용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과정 속에 있으며 우리 자신을 앞질러 있는 미완성 존재다. 우리를 역사적 존재로 칭하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자기 초월의 능력을 지녔으며 오직 죽었을 때만 우리 자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욕망의 존재로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과 열망하는 것 사이에서, 또한 우리가 욕망한다고 의식적으로 상상하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것 사이에서 늘 분열되어 있다. 이것들을 비롯한 여러 의미에서 우리는 분열된 주체다. 이것은 우리가 조야한 물질과 순수한 정신의 난감한 혼합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일부 철학자들은 영혼을 몸의 본질로, 몸의 통일 원리로 간주해왔다. 그런데 이 견해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완전히 동일한 경우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p. 37~38
요 근래 프랑스와 관련된 책들을 읽고 있었는데 독일철학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은 오랜만이다. 서점을 배회하던 중 발견한 책이 두 권인데 한 권은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이고 다른 한 권은 임마누엘 칸트의 「굿윌(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다. 우선 제목이 간단명료하다. (주제 자체는 매우 심오해 보이는데도..) 그리고 얇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계산대로...*~*
칸트의 「굿윌」 같은 경우 (따로 포스팅 하겠지만..) 흔히 독일철학에 생각하는 것처럼 관념 또는 개념에 대한 정의가 엄격하고 문장도 정제된 느낌이 있다. 반면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의 경우 '오소리에게는 영혼이 있을까?'라는 두 번째 챕터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책 속에 저자의 재치가 다분히 곁들여져 있는데, 어찌 되었든 유물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크스, 니체를 해제(解題)한 책이라는 점에서는 맥락을 조심스럽게 따라가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감각적인 이미지가 넘쳐나고 신속하고 간단하게 커뮤니케이션하기를 선호하는 세태에서 '철학이 필요한가?'하는 의문점이 들 때가 있었다. 현학적인 용어들, 오랜시간 곱씹어 생각해봐야 하는 어려움, 무엇보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지금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적당히 세상을 바라보고 적당히 사람과 소통해도 먹고 자는데 문제는 없으니까. 또 불편함이 생긴다면 투표를 통해 의사표현을 하거나, SNS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으므로.
사실 나는 유물론에 이토록 다양한 관점차가 존재하는 줄 몰랐다. 내가 배운 철학이라곤 서양 고대/중세 정치사상이었기 때문에, 근대에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유물론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몇 번 스치듯 듣고 넘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무려 중세시대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유물론에 대한 논의의 장에 포섭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하간 '유물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리는 문구는 이런 것이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다' 등등. 또 갖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은 이렇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결국 뇌 속의 신경회로들이 점화되어 생성된 의사결정체계에 불과하다. 인간은 수억년간 물리적 환경에 맞춰 진화한 생명체다. 물론 이런 문구들이나 관념들이 순전하게 유물론에 대한 오해라 보기도 어렵고, 완전히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 테리 이글턴은 이처럼 인간의 삶이 철저히 물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유물론적 관점―저자는 이를 '생기론적 유물론' 또는 '신유물론'이라 일컫는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테리 이글턴은 인간의 잠재된 가능성을 제한하는 신유물론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하려는 새로운 양식의 유물론(신체적 유물론)은 결국 이원론(몸 바깥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하다. 이 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처럼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감각에 의지하는 동물과는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대목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하기도 하다.
책의 여러 인용 중에서 특히나 공감을 했던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소개 부분이었는데, 마르크스는 《경제철학수고》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극심하게 몸을 결여한 채 이성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본문 p.100) "모든 신체적 정신적 감각들을 밀어내고 그 모든 것들의 단적인 소외가, 곧 소유 감각이 들어섰다. 내적인 부를 바깥으로 낳기 위하여, 인간 본성은 이 절대적 빈곤에 빠져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신체적(몸의) 연장이라고 볼 수 없는 타인의 소유를 갈망하며 괴로워하고 보다 가공(可恐)할 생산양식을 발달시킨다. 숨막히는 일이다.
그밖에 니체의 극우주의적이기까지한 극단적 사상에는 크게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유물론」을 읽고나서 한창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칸트의 「굿윌」로 넘어갔는데, 어째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생각이 명확해지기보다 흐릿해진다. 인간은 유물론에 관한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언어를 다루고 감각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지구상 유일무이한 '자율적' 존재인 것인가? 게다가 칸트가 말하듯 인간에게는 선험적으로 순수이성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세상은 왜 선행보다는 악행이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지지만 묘하게 재미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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