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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클로드 레비-스트로스/한길사>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읽고 나서 20세기의 마지막을 살았던 예전 사람들이 동시대의 우리보다 더 생각이 깊고 인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은 ‘스마트’다 ‘인공지능’이다 인간의 삶이 편리해졌지만, 반대급부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것 같다. 오늘날의 우리는 심적인 여유를 갈망하면서도 길게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긴 문장을 기피하고 인간관계를 천천히 쌓아올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를 대신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줄임말로 점철된 토막난 텍스트들과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과 관계 유지이다.
레비-스트로스처럼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하나의 부족에 천착(穿鑿)하여 집요하고 끈질기게 탐구하는 태도는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기야 오지에 들어간 연예인들의 생존기를 촬영한 예능까지 방영되는 시대에 ‘인류학’이라는 것, 또한 타자의 발견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얼마나 있을지 따지는 것 자체가 사치일는지 모른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단 한 번도 조우(遭遇)한 적 없는 두 세계가 마주할 때, 어느 쪽이든 발견되기 이전의 순수함을 상실하게 마련이고, 특히나 지금처럼 촬영도구와 대중매체가 발달한 시대에 ‘미지(未知)의 세계’라는 표현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하다 못해 몰래카메라에 의해 알려지고 싶지 않은 사실마저 알려지고 ‘잊혀질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요즘의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 ‘인류학’ 자체가 이러한 상충(相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상을 분열시키고 타자화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삶이요 인간 자체라 한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불편한 편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한편 이 역시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했듯이 인구의 수효(數爻)가 많아질수록 열등한 계급의 규모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과밀화된 일부 국가에서 국민들이 낮은 수준의 삶을 누리게 되는 까닭을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슷하다. 양적인 진보는 질적인 진보에 반비례하고, 물질적인 진보는 정신적인 진보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여하간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소위 ‘문명사회’라 일컫는 것과 ‘미개사회’라 부르는 것 사이의 대칭성이기는 하지만, 저자도 글의 말미에 이런저런 생각을 덧붙이고 있듯 나 역시 그의 생각을 곱씹어 보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공간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간의 여행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 사회적 서열에서의 변화도 수반된다. 우리가 받은 인상들을 적절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각각의 세 가지 요소를 서로 관련시켜야만 한다. 공간 하나만 하더라도 세 개의 국면을 지니고 있으므로, 여행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브라질의 해변을 거닐자마자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대서양과 적도를 건너서 열대 부근에 왔다는 사실을 이 몇몇 확실한 징표로써 알 수 있었다. 이 징표 가운데서 후텁지근한 열기는 내가 보통 때 입고 있던 모직물의 옷을 벗게 하였고, ‘집 안’과 ‘집 바깥’이라는 구별을 없애버렸다. 반면에 완전히 인간화해버린 우리네 풍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과 미개척 자연과의 대립이 이곳에는 있음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도처에 종려나무나 낯선 꽃들이 있으며, 또한 꼭지를 떼어내면 술 냄새가 물씬 나는 달콤하고 시원한 즙을 마실 수 있는 푸른 야자나무 열매가 살롱 앞마다 수북이 쌓여 있다. (p.211~212)
사회학자는 전세계적이고 구체적인 인도주의를 공들여 만들어내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 사회생활에서의 규모가 큰 시위운동과 예술작품은 둘 다 무의식적인 삶의 수준에서 태어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집합적인 것이며, 후자는 개인적이라는 상이성이 있다 하여도 그 차이는 무의식적이며, 다만 공중에 의한 것과 공중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나 차이가 드러날 뿐, 공중은 똑같이 공통분모를 제공하고 그들이 태어날 조건을 결정지어준다.
도시는 자주 교향곡과 시에 비유되어 왔으며, 내게는 그러한 비교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사실 그것들은 같은 종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마 도시는 자연과 인공의 합류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소중한 것으로 평가될는지 모른다. 도시란 그 생물학적 역사를 도시의 경계 안에 가두고 있는 동물의 협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 피조물의 입장에서 사고하고자 하는 모든 의도에 의해 도시는 빚어지고 있다. 도시는 그것의 유래와 형태에 의함과 동시에 생물학적 출산, 유기적 진화 및 미적 창조의 요소를 소유하게 된다. 도시는 자연의 대상인 동시에 문화적 주제이니 개인임과 동시에 단체, 체험된 것임과 동시에 꿈꾸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다. (p.267)
인도의 이 대(大)실책은 하나의 교훈을 던져준다. 하나의 사회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사상가들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예속(隸屬)을 분비해가면서가 아니면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 지리적, 사회적, 지적 공간 안에서 답답해졌을 때는 한 가지 간단한 해결책이 그를 유혹할 우려가 있다. 그 해결책이란 인간이라는 종(種)의 일부에 대해서 인간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몇십년 간쯤은 나머지 인간은 마음대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난 후에는 또 새로운 추방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p.310~311)
각각의 사회마다 이중의 대립성이 존재한다. 첫째로 3분조직과 양분조직, 대칭성과 비대칭성의 조직형태가 서로 대치되고 있다. 둘째로는 상보성(相補性)에 기반을 둔 사회기구와 상하의 서열관계에 기반을 둔 사회기구가 서로 대치되고 있다. 이 같은 모순적인 원리에 충실하기 위한 결과로서 사회집단은 연대를 맺고 있는 집단과 대립되는 집단으로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한다. 문장(紋章)이 많은 분리된 선들로부터 파생된 특성들을 상징적으로 집합한 것이듯이, 사회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등분(trailler)되거나, 제단(couper)되거나, 좌우로 등분(partir)되거나, 또는 우상에서 좌하로 비스듬히 양분(trancher)된다. (p. 379)
문자는 인간의 지식을 공고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하나의 영속적인 지배체계의 확립에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왔던 것 같다. 이 문제를 우리들의 시대에 보다 가까운 시대로 가져와보자. 19세기 유럽에서 의무교육의 확대를 위한 노력은 군복무의 연장 및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와 함께 발생되었다. 가끔 중앙의 권위에 의해서 개별적인 시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실행되었던 증가된 권력과 이 문제에 대한 투쟁을 구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법에 대한 무지가 불법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주의(主義)는 오직 모든 사람이 정부가 법령으로써 공포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p. 547~548)
족장은 명확하게 규정된 권한이나 공적으로 인정된 권위에서 그의 기반을 구할 수는 없다는 점을우선 말해두어야만 하겠다. 동의가 권력의 근원을 이루며, 또한 동의가 족장의 지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두 사람의 불평분자들이 비난받아야 할 행동을 하거나 악의를 표명한다면, 족장의 모든 계획이 어긋나버리고 공동체의 행복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족장은 다른 성원들 모두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때만이 불만족스런 요소들을 제거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현명함이란 전권을 장악한 군주가 지닌 현명함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다수의 동의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치가의 수완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 사실이 족장으로 하여금 그의 집단을 충분하게 결합시키게 하지는 않는다. 그의 무리들은 유랑생활 중에 그 집단이 실질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할지 모르나, 다른 이웃 집단들이 그 부근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족장은 다른 집단의 족장보다도 더 훌륭하게 지도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집단도 그가 다른 족장들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지도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p. 565~566)
이 모든 사실들의 결과로써 권력의 심리학적 기초가 ‘동의’라는 것은 명백해진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동의는 족장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전개되는 급부와 반대급부의 작용 가운데서 나타난다. 권력의 또 다른 기본적인 속성은 상호교환의 관념이다. 족장은 권력을 소유하지만 관대해야 한다. 그는 책무를 지니고 있지만 또한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 족장과 집단 사이에는 급부와 특권, 편익과 의무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p. 575)
자기 자신의 사회에서는 비판적이고 다른 사회에서는 동조주의자인 민족학자는 하나의 모순적인위치에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모순 속에는 더욱 회피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만약 그가 그 자신의 사회체계의 개선에 이바지하려고 원한다면, 그는 어느 사회에 가든지 그 자신의 사회에서 통탄하는 것들과 유사한 조건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는 제한적이고도 공정한 입장을 잃고 마는 셈이다. 반대로 모든 사회를 두루 알고자 하는 이는 아무 사회도 비판하려 들지 않는 법이므로, 도덕적 책임감이나 과학적 엄정성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초연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그로서는, 자신의 사회를 비평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외부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법이다. 반면에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이는 사회 개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p. 693)
만약 어떤 다른 사회의 관찰자가 조사하게 된다면, 우리들 자신의 어떤 관계들이 그에게는 우리가 비문명적이라고 간주하는 식인풍습과 유사한 종류로 간주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들의 재판과 형벌의 습관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만약 우리가 외부로부터 이것들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상반되는 사회형을 구별해보고 싶어질 것이다. 식인풍습을 실행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중화시키거나 또는 그들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자기네의 육체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우리들 사회 같은 두번째 유형의 사회는, 이른바 앙트로포에미아(anthrophemie : 특수 인간을 토해버리는, 즉 축출 또는 배제해버리는 일)를 채택하는 사회이다.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여 그들은 정반대의 해결책을 선택했다. 그들은 이 끔찍한 존재들을 일정 기간 또는 영원히 고립시킴으로써 그들을 사회로부터 추방한다. 이 존재들은 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시설들 가운데서 인간성과의 모든 접촉을 거부당한다. 우리가 미개적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 같은 관습은 극심한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 그들이 오직 우리와는 대칭적인 관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간주하듯이 우리들 자신도 그들에게는 야만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p. 696)
그 신화적 심상(心像)을 소유했던 시대에서는 인간은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더 자유스럽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었다. 자연에 대해 다만 매우 제한된 통제력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인간은 꿈(이상)이라는 완충장치에 의해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해방시키기도 하였다. 이 같은 꿈들이 점차 지식의 형태로 바뀌어감에 따라서 인간의 힘은 증대하였다. 그러나 자연계와의 투쟁에서 이김으로써 얻은,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간의 힘이란 기실 인류와 물질계의 점차적인 융합에 대한 주관적 의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물질계에서의 거대한 톱니바퀴는 이제 인류에 대해서 무서운 이방인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고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 대행자 역할을 맡게 된, 고요한 세계의 식민주(植民柱)로서 작용할 뿐이다.
만약 인간성이 미개상태의 태만과 우리들의 자부심에 의해 가속되고 있는 추구활동 사이의 중간지역을 고수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행복에 더 좋을 것이라고 루소가 주장한 것은 틀림없이 옳은 생각이었다. 루소는 그 중간상태가 인간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직 사건들의 어떤 불길한 전환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 상태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들의 전환은 기계문명의 발달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기계문명은 처음에는 독특하다는 점에서, 둘째로는 때늦은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중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루소가 말한 그 중간상태는 결코 하나의 미개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직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진보를 전제하며 또 용인한다. 그리고 이 발달의 시점에서 거의 언제나 발견되었던 ‘야만인들의 사례가 인류는 영원히 그 중간상태에 머무르도록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듯하더라도, 지금까지 기술된 어떤 사회라도 그 중간상태의 특권적인 이미지에 일치하지는 않는다. (p. 702~703)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또는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개화이다. 그러나 그 역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독립적인 위치를 배당하지는 않는다. 또한 비록 인간 자신이 저주받을지라도 그의 헛된 노력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몰락과정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인간성의 운명적인 역할과는 전혀 달리, 인간의 역할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완전한 점에까지 도달해 있는 하나의 기계와 같다. 이 기계의 활동은 처음의 질서를 급히 해체하여, 어떤 강력하게 조직된 물질을 점점 커지다가 언젠가는 명확해지게 되는 타성의 조건으로 빠뜨리게 한다. 숨을 쉬는 방법과 살아 나가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던 시대로부터 불을 발견한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의 원자 및 원자핵반응에 필요한 설계를 발명해내기까지 인간은 수백만 개의 구조들을 즐겨 분해하여, 그 요소들을 재결합할 수 있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한다. 물론 인간은 도시도 세웠고 땅도 경작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같은 활동들을 면밀하게 조사해본다면, 우리는 이 활동들 또한 타성을 생기게 하는 기계들이며, 이 기계들의 활동 범위와 속도는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조직의 총체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 742)
인간정신의 창조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창조란 정신과의 관계에서만이 의미를 지니고, 정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즉시 무로 빠져버린다. 그러므로 하나의 전체로서의 문명은 매우 복잡하게 된 하나의 매커니즘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비록 그 매커니즘을 존속이라는 우리 우주의 최대의 희망으로서 간주해보고 싶지만, 그것의 진실한 기능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엔트로피’―말하자면 타성, 무력증―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주고받는 모든 대화나 인쇄된 각행(各行)은 두 사람의 대화자 사이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을 확립하며, 두 개의 상이한 면에서 이미 존재하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보다 큰 조직도를 지니게 되었던 것을 평준화시킨다. 최고도로 전개된 형태 속에서 이 해체의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의 이름은 ‘인류학(anthropologie)’이라기보다는 ‘엔트로폴로지(entropologie)’라고 써야 할 것이다.(p.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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