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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움베르토 에코/열린책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은 『장미의 이름』을 읽은 것이 전부인데,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가장 크게 놀라는 점은 아무래도 그의 박학다식함이지만, 또 한 가지 눈여겨보는 것은 사회에 대한 해학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수도사를 등장시킴으로써 종교신앙의 교조주의적 태도를 비판했다면, 『제0호』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기득권의 부패와 이에 편승하는 언론에 대해 비판의 일격을 가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이 책에서 ‘나’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화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언론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네 번째 기둥으로까지 일컬어졌던 언론은 오늘날 과연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미국 대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이슈는 바로 ‘가짜뉴스’였다. 채널이 다양해지고 통신기기가 급속도로 발달하는 이 시대에 가짜뉴스라니?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들어맞는 뉴스를 찾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뉴스가 쏟아지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한들,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경위에 관한 심층적 내용이나 예상되는 전개방향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은 똑같고, 산업혁명 이전에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것이, 지금은 SNS를 통해 회자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주주 콤멘다토레를 대신해 ‘시마이’라는 인물이 <도마니>의 창간을 추진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내일’이라는 의미를 지닌 ‘도마니’ 신문에서는 과거의 사건을 싣지 않는다. 그들이 싣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내일에 벌어질 만한 일들이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가 말해주듯 상황은 그리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주주인 콤멘다토레의 이익에 위배되는 주제는 다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퀴즈나 운세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에 대해 기자들이 논쟁을 벌이곤 한다. 무엇보다도 <도마니>의 기획 자체가 신문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기 위해 추진된 것이 아니고, 주주인 콤멘다토레의 권력―권력자들의 클럽에 가입을 승인 받는 것―을 위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실제 역사를 방불케 하는 브라가도초의 무솔리니에 대한 취재 뒷이야기는 이야기의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애당초 기사(記事)라 함은 기자에 의해 토픽이 선정되는 것이고 역시나 기자에 의해 사건의 경위(經緯)가 밝혀지는 법이다. 때문에 기자의 관점과 독자의 관점은 결코 일치할 수 없고, 때로는 얼토당토 않는 기사를 양산함으로써 기자가 독자를 기만(欺瞞)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와 ‘마이아’는 수사망을 점점 좁혀오는 모종의 조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언론의 무능함과 권력의 부정(不正)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든 또는 다른 형태로 위장하고 있든, 그들은 왜곡된 세상에서 발을 뗄 수 없다. 오늘날의 언론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소통하는 장(場)이 되기보다, 권력자에 의해 윤색된 정보를 전파하는 일방향적인 기계장치로 전락해버렸다. 거꾸로 말해, 정보를 통제하는 자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 때 정보라는 것은 참과 거짓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실재하지도 않는 뉴스가 몸집을 불리기에 이르렀다. 근현대사에서 남북간에 전쟁을 경험하고, 독재를 경험했으며, 다당제 국가로 나아간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글이 우리에게도 유효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패배자는 독학자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승리자보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저 한 가지만 잘 알아야지 무엇이든 다 알겠다고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건 패배자들이 겪는 업보이다. 어떤 사람의 지식이 늘면 늘수록, 그에게는 잘못 돌아가는 일들도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p.24~25)
죽음에 대한 공포는 기억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p.28)
「그런데 말입니다.」 코스탄차가 끼어들었다. 「휴대전화가 갈수록 유행하고 있어요. 어제 열차를 탔는데, 옆에 앉은 남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서 자기 은행과 어떤 식으로 거래하는지 길게 말하더군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도 그 남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될 정도였어요.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미쳐 가고 있어요. 이런 경향을 다루는 기사를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p.139)
보다시피, 신문들은 뉴스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뉴스를 덮어서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p.250)
「당연한 거야.」 마이아가 말했다. 「브라가도초가 당신에게 강조한 것처럼, 그 모든 뉴스는 오래전부터 유포되고 있었어. 다만 집단의 기억에서 뉴스들이 지워졌던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려면 기록 보관소나 신문 잡지 자료실에 가면 돼.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대학 시절에도 신문을 읽었고, 유명 인사들의 연애에 관한 기사를 쓰던 시절에도 신문을 읽었어. 나 역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었어. 그런데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잊어버렸어. 마치 새로운 폭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전의 뉴스를 지워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끌어내어 다시 죽 늘어놓기만 하면 돼. 브라가도초가 바로 그 일을 했고 BBC도 그 일을 한 거야. 재료를 혼합해서 저마다 칵테일을 만들었어. 그래서 우리 앞에 두 잔의 완벽한 칵테일이 있어.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어.」 (p.308~309)
「이 나라에서 이제 그 무엇이 우리를 동요시키겠어? 우리가 무엇을 겪었는지 생각해 봐. 우리는 옛날에 야만족들의 침입을 겪었고, 로마가 약탈당하는 수난을 당했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 체사레 보르자가 세니갈리아에서 정직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60만 명이 죽었지.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우리 땅이 지옥이었어. 그러니 폭탄 테러 때문에 40년에 걸쳐서 수백 명의 목숨을 잃었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정보기관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그런 얘기가 먹힐 것 같아. 보르자 가문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그건 웃기는 장난이지. 우리는 단검과 독약의 백성이었다고. 우리는 면역이 되어 있어. 누가 새로운 이야기라면서 우리에게 뭔가를 들려주기도 하지. 그러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나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해. 그러고는 듣고 보니 그 얘기는 가짜일 거라고 덧붙이지」 (9.312)
「내 소중한 사람, 우리가 찾고 있는 나라는 비밀이 없는 나라, 모든 일이 모두가 다 알도록 뚜렷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야. 중남미 어딘가에 그런 데가 있을 거야. 감출 게 없는 곳이야. 사람들은 다 알아. 누가 어느 마약 카르텔에 속해 있는지, 누가 혁명 게릴라들을 이끄는지 다 알지. 레스토랑에 가서 앉아 있으면, 친구들 한 패거리가 지나가. 그들은 무기 밀수의 대장이라면서 어떤 사람을 당신한테 소개해. 아주 잘생긴 남자야.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향수도 뿌렸어. 풀기가 빳빳한 흰 셔츠를 입었는데, 그 셔츠를 바지 위로 내리고 있어. 종업원들이 몸을 숙여 인사를 하면서 <세뇨르, 이쪽으로 오시죠>를 연발해. 그때 경찰 지휘관이 그에게 경의를 표해. 그야말로 비밀이 없는 나라야. 모든 일이 모두가 다 알도록 뚜렷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경찰은 법률에 따라 부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정부와 악의 세계는 헌법의 규정에 따라 공존하고 있으며, 은행은 더러운 돈을 세탁하면서 살아가고, 수상하지 않은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재 허가증을 빼앗기는 불행에 빠져. 그들은 서로를 통해 총을 쏴. 하지만 자기들끼리만 그럴 뿐, 관광객들은 조용히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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