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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일상/book 2018. 11. 2. 19:25
<보이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카를로 로벨리/쌤앤파커스>
가끔 과학 분야의 서적을 찾아 읽곤 한다. 확 꽂히는 주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과학에 문외한이 되지 않기 위해 읽는 정도인데, 이 책은 <눈에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자못 철학적인 명제를 달고 있어서 서가 진열된 책 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 잡았다. 책은 현대 이론물리학의 축을 이루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해 다루는데, 원자론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착안한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이야기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간다. 도표화한 개념 정리와 이해를 돕는 삽화, 무엇보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저자의 배려 덕분에 책을 읽어나가는 것은 수월하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한 게 맞는지 찝찝한 내용들이 몇몇 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현대 양자역학이 접점으로 수렴해가는 과정에서 몇몇 핵심 개념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버렸다.
이론물리학에서 시공(時空)에 대해 장(場)과 입자(粒子) 개념을 도입해 설명하는 대목은 매우 충격적이다. 현대물리학에 따르면 ‘지금 여기’라는 개념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속도의 최대치를 규정한 상대성이론, 정보의 최소량을 규정한 양자역학, 최소 길이를 규정한 양자중력 각각의 발견은, 존재를 쪼갤 수 있는 마지막 단위가 존재함을 밝힘과 동시에 그 ‘마지막 너머’에 아직 밝히지 못한 무한의 영역이 남아 있음을 시사(示唆)하기도 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앎으로써 성장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모른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무한 또는 발산(發散)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영역이 남아 있는 한,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양자중력에 대한 논의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에 빗대어 ‘진리’를 희구(希求)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앎의 실천을 행해야 함을 말한다. 또한 모든 사물과 현상을 과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거듭된 시행착오를 통해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과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쯤 되면 드는 생각이 크게 두 가지인데, 그 내용은 좀 상반적(相反的)이다. 1) 세상을 서술하는 과학의 능력이 이토록 뛰어날진대, 세상을 서술하려는 또 다른 시도들―사회과학, 인문학, 또는 종교학까지도―도 종국에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에 수렴할 것인가?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은 없는가? 가령 ‘옮고 그름’의 문제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저자가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김새를 지닌 여러 마리의 말을 볼 때 각각의 존재가 ‘말임(horseness)’을 안다. 개별적 실체로서 말의 형상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동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흰 말, 얼룩말, 작은 말, 큰 말, 빠른 말, 느린 말을 ‘말’이라고 통칭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관념(이데아)이라는 것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이 무엇임을 안다. (참고로 예전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양자역학으로 환원시켜 풀이하려는 시도에 대한 글을 읽은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념’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무용(無用)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과학과 조화롭게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혀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먼저 법과 도덕의 관계에 대해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법과 도덕은 교집합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각각의 차집합이 존재하는 보완적 관계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는 반드시 흰색으로 칠하도록 된 규칙(도덕과 무관한 법률)이나 노인에게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법률과 무관한 도덕심)가 그에 해당한다. 과학 자체는 법과 도덕처럼 ‘옳고 그름’을 재단하지 않는다. 철학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인간이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개발된 플라스틱 제품은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바로 그 편리한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 그 자체로는 과학 자신을 자정(自淨)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4차 산업혁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과학기술을 연구해야 하고, 줄기세포 배양에 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과학적’이라는 수식어, 또는 ‘—% 함유’, ‘유기농’, ‘—인증’ 따위의 문구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좋고 나쁨을 결정짓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은 자연스럽다.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를 연구하고, 태양계 너머의 세계를 관측함으로써 인류의 문명은 새로운 물길을 틀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당장 가깝게 필요를 느끼는 것은 과학적 진실보다는 옳고 그름 또는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다. 어제 러닝머신을 달리며 TV를 보는데 우주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토성의 아름다운 고리를 보며, 태양의 거대한 코로나를 보며, 생명체의 존재가능성이 높은 위성들을 보면서 그저 고혹적(蠱惑的)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명왕성을 벗어난 보이저호는 인류의 존재를 알리는 골든디스크를 탑재한 채 20억년 동안 태양계를 돌 거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도 꿈결 같은 이야기다. 만약 외계생명체의 발견이 우리 인류의 존재의미를 규정하는 외재적 충돌이라고 한다면, 그 대척점에서 우리 내부를 관찰함으로써 존재의미를 실마리를 찾으려는 내재적 고찰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깥세상에 함몰된 나머지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그런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즈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것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상을 옹호하느라고 그렇게 했던 것인데요,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지식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주의적 설명을 거부했고, 목적론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옹호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고 믿는 것이죠. 이런 방식의 생각은 자연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이후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이 세계를 좋음과 나쁨의 견지에서 이해하려고 한 것은 인간과 무관한 문제들과 인간적인 주제들을 혼동했던 것이었습니다.
―p.26
빛은 이처럼 패러데이 선들의 거미줄의 빠른 진동일 뿐입니다. 바람 불 때의 호수 수면처럼 물결치죠. 그래서 우리가 페러데이 선들을 ‘못 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동하는 패러데이 선들만 봅니다. ‘본다는 것’은 빛을 지각하는 것이고, 빛은 패러데이 선들의 움직임이니까요. 무언가가 옮겨주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공간 속의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뛰어넘어 갈 수 없습니다.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가 우리 눈에 보인다면, 그건 아이들과 우리 사이에 이 진동하는 선들의 호수가 있어서 아이들의 영상을 우리에게 옮겨주기 때문입니다.
―p.64
이는 화성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해 아인슈타인은 ‘절대적 동시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우주에는 ‘지금’ 존재하는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우주의 모든 사건들의 집합은 하나의 현재가 다른 현재를 뒤따르는 ‘지금’들의 연속으로 기술될 수 없습니다.
―p.74~75
이 새로운 역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의 개념들 역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결합되어 하나로 합쳐집니다. 1905년 이전에는 두 가지 일반적인 원리가 확실해 보였습니다. 질량보존의 법칙과 에너지보존의 법칙이 그것이죠. 질량보존의 법칙은 화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입증되었습니다. 화학반응에서 질량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두 번째 법칙인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뉴턴의 방정식에서 직접 따라 나왔고, 가장 일반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법칙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에너지와 질량이 동일한 존재자의 두 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자기장과 전기장이 동일한 전자기장의 두 면이고,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시공의 두 면인 것처럼 말이죠.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의 단일한 보존법칙만이 존재하는 것이죠.
―p.76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세계에서는 물리계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고는 그 어떤 실재도 없습니다. 사물이 있어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가 ‘사물’의 개념을 낳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대상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사건들의 세계이며, 사물들은 이 기본적인 ‘사건들’의 발생 위에 구축되는 것입니다. 1950년대에 철학자 넬슨 굿맨이 아름답게 표현했듯이, “대상은 한결 같은 과정,” 잠시만 자신을 똑같이 되풀이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마치 파도가 바닷속으로 녹아 들어가기 전에 잠시 모습을 유지하듯이, 돌은 잠시 구조를 유지하는 양자들의 진동입니다.
―p.136
입자성 : 계의 상태 정보는 유한하며, 플랑크 상수에 의해 제한된다
비결정성 : 미래는 과거에 의해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더 엄격한 규칙성조차도 실제로는 통계적이다.
관계성 : 자연의 사건들은 언제나 상호작용이다. 한 체계의 모든 사건들은 다른 체계와 관계하여 일어난다.
―p.137
속도 : c(특수상대성이론); 최대 속도의 존재
정보(작용) : H(양자역학); 최소 정보의 존재
길이 Lp(양자중력); 최소 길이의 존재
―p.228
왜 정보의 개념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며 근본적이기까지 할까요? 정보는 한 물리계가 다른 물리계와 소통하는 능력을 측정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로 돌아가봅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말로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무언가를 더해야 하는데 그 무언가가 바로 사물의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에게서는 이 형상들은 어떤 절대적인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더 현실적이지만 그에게서도 형상은 물질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결합할 때 그 결합 방시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형태와 구조상의 배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p.236~237
1. 그 어떤 물리계에서도 관련 정보는 유한하다.
2. 어떤 물리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항상 얻을 수 있다
―p.241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세계를 이루는 관계들의 연결망에, 즉 상호적 정보들의 연결망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언제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실재를 여러 대상으로 쪼갭니다. 그러나 실재는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변성에 경계를 지음으로써 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다의 파도를 생각해보세요. 파도 하나는 어디에서 끝나나요? 어디에서 시작하나요?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파도는 실재입니다. 산을 생각해보세요. 산 하나는 어디에서 시작하나요? 어디에서 끝나나요? 땅속 어디까지가 그 산일까요? 이는 모두 의미 없는 물음입니다. 파도 하나 산 하나는 그 자체로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야기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세상을 나누는 방식들입니다. 그것들의 경계는 자의적이고 관습적이며 편의적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가진 정보를 조직하는 방식들, 아니 그보다는 우리가 가진 정보의 형식입니다.
―p.249~250
데모크리토스는 ‘사람’을 이상하게 정의합니다. “사람이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신체의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그가 속한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상호작용의 연결망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지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에 관한 다른 이들의 앎,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앎, 우리에 관한 다른 이들의 앎에 관한 우리의 앎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상호적 정보의 풍부한 연결망 속의 복합적인 매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직은 이론입니다. 우리의 내적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행로죠.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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