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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모니카 마론/문학동네>
대학로에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비었다. 마로니에 공원 근처의 건물 안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 서점을 향했다. 생각보다 혜화역 일대에 서점이 많지는 않았고, 알라딘은 거리가 꽤 되었다. 하릴없이 이음책방으로 향했는데, 지하에 자리잡은 아담한 서점이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을까 생각했지만, 최대한 가벼운 책을 고르자는 생각에서 발견한 것이 이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두께가 그리 두껍지 않다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이유가 없다;;
책은 구 동독에서 거주하던 한 여성이 독일통일을 전후하여 겪는 이야기로, 다분히 자전적인 성격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줄곧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굿바이 레닌>이라는 독일 영화였다. 영화는 동독에 사는 한 가족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겪는 정체성의 위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슬픈 짐승>이 그리는 인간상과 사회상이라는 것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
화자인 노년 여성은 자신의 나이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어디로 떠나보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강렬하게 남은 몇 가지 기억은 패전직후 분단상황에 놓여 있던 동독에 대한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던 프란츠라는 남성에 대한 애끓는 기억이다. 프란츠라는 인물은 서독 출신의 인물로 화자와 프란츠가 어느 박물관에서 조우(遭遇)했을 때에는 이미 기존의 사회―각각 동독과 서독에서―에서 가정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화자와 프란츠가 서로를 발견하는 과정은 시간적으로는 동일한 시대를 살았으나 공간적으로는 분리되어 살아왔던 두 남녀가 들어맞지 않는 퍼즐조각을 서로 끼워맞추는 과정이다. 화자는 말한다. 동서(東西)로 공간이 나뉘지 않았더라면 프란츠와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져 있었을까. 프란츠와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화자는 자신의 심리적 고립감을―또는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심리적 유대의 단절을―하드리아누스 장벽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화자와 프란츠의 관계가 순탄하게 끝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 물리적으로는 통일된 상태이지만 화학적으로는 결합되지 않은 독일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양만 갖출 것이 아니라 내실까지 채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독일의 현대문학을 접할 때마다 작품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무력감에 비추어 옛 독일과 마찬가지로 분단된 상태의 우리 상황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남자들은 언젠가 아버지가 되어 자신을 퍼뜨려야 한다는 두려움을 유년기에 견뎌냈다. 이 두려움이 어떤 남자나 자신 안에 있는 아이의 입을 다물게 만들거나 아버지 신분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온화하고 인내심 있는 아버지가 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무력함의 오점이 달라붙어 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이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해야 할 것이기―또는 분명 그것을 원할 것이기―때문이다.
그들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은 아들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부상당한 몸과 낙인찍힌 전쟁의 영혼들을 치료할 장소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책에서 보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망 없는 부상병들처럼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을 페르시아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켰을 때 그들은 아내가 기다리는 그리스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페르시아인들이 그들의 손이나 발을 잘라내고 귀나 코를 베어냈는데···
―p.56
여자의 삶에 붙어 있는, 원래부터 붙어 있는 것 같은 우스꽝스런 점들이 만일 파트너 관계와 후손을 얻으려는 싸움을 위해서 면제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고분고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들은 살아 돌아온 병사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전후 시기의 힘든 경쟁 조건에 순응했던 것이었다. 실크스타킹이 생필품만큼 모자랐고, 멋진 다리를 드러내는 것은 요리솜씨를 광고하며 남자를 정복하는 것만큼 사치스런 조달 활동을 요하는 일이었다.
―p.59
에밀레가 죽은 해는 자유의 해였다. 어쨌든 나중에 신문과 공식적인 대화에서는 통례적으로 그해를 그렇게 지칭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격정적 표현을 즐기는 사람들 또한 한번쯤은 자유의 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부터 갈라놓고, 느슨한 것을 확고한 것으로부터, 덧없이 흘러가는 것을 뿌리 깊은 것으로부터 갈라놓는 바람처럼 오는 것, 그런 것이 자유라면, 그렇다면 그해는 자유의 해였다. 그 당시에는 어떤 것도 예전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새 돈, 새 증명서, 새 관청, 새 법률, 새 경찰제복, 새 우표가 나왔다. ···도로와 도시들의 이름이 바뀌었고 동상들이 헐리고 새로운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p.73
아마 그랬겠지. ···아마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야. 나는 오히려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는 편이지. 행복은 무상한 거야. 프란츠가 말한다. 그것은 책에도 쓰여 있고 우리 나이에는 경험으로도 알고 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이 꿈의 무상함인지 현실적 삶의 무상함인지 가리면 뭔가 달라질까? 내가 그것이 꿈이라고, 꿈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다짐하면 나는 그 꿈이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 순간에 무조건 빠져들 수 있다.
프란츠의 손가락 끝 사이에서 포도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프란츠가 우리를, 자기와 나를,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현실로서 참아내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쓴다. 꿈이라면 조만간에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에게 우리가 현실이라면 우리가 너무도 아름다운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p.96~97
'의미'라고밖에 달리 지칭할 수 없는 그것을 나를 위해 간직하고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이 도시에 단 한 곳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거리들과 스낵코너, 뒤섞여 흘러가는 사람들의 물결이 너무나 의미 없어 보여 마음속에서 내가 거기에 속해 있다는 희미한 감정만이라도 찾으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츠라는 매개가 없으면 나는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직 브라키오사우루스 아래의내 자리만은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 행동의 부조리성에 굴복하지 않는 지속성에 대한 약속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p.107
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 내 안에 있는 공룡성, 원시적인 어떤 것, 격세유전의 폭력성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언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프란츠에 대한 내 사랑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
―p.108
나는 비논리적인 내 감정보다 더 현명할 것 같은 대답은 찾지 못했다. 개미들은 그 안에서 1억 3500만 년 동안 또는 그보다 더 오래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어떻게 체계화되어 있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개미들처럼 살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사멸을 택할 것인가? 나는 사멸을 선택했고, 프란츠는 그것이 나다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끊임없이 결정을 내리려 한다고 그가 말했다. 개미처럼 살라고 내게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내가 열정적으로, 나의 사멸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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