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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습지 "모래벌(沙旨浦)" : 사막과 오아시스여행/2019 한여름 창녕 2019. 7. 19. 00:32
사지포(모래벌)는 눈앞에 길이 보여도 무엇이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그야말로 길 자체가 보이지 않아 느끼는 두려움 모두를 경험하게 한 곳이었다. 딱따구리가 먹잇감을 찾아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의 적막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길의 오른편으로는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맹그로브숲만큼 열대림은 아니지만 활엽수들이 물가와 뒤섞여 자라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격렬하게 났는데, 꿩이 황망히 날아가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고 네 발 달린 짐승이 내는 소리였던 것 같은데 어슴푸레한 윤곽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우포늪 가장자리를 따라 쭉 걸어본 결과 사지포를 둘러보는 것은 초행자로서는 대단히 고생스러운 일이다. 안내지도를 보아도 사지포의 끝지점이라 할 수 있는 가시연꽃마을 부근은 (아마도 산책로로 부적절하다는 의미에서) 점선 표시가 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크고 작은 습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사지포의 습지는 풍경이 이색적이기는 하지만, 수고를 덜고 싶다면 사지포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가시연꽃마을 방면으로 갈 것이 아니라 잠수교 방면으로 갈 것을 권한다. 인적도 아예 없는 데다 여름철 무더위에 무모하게 들어섰다가는 체력이 축나는 것도 한 순간이다.
나는 그마저도 길을 소야마을 방면으로 접어들어 한참을 걸어간 뒤 이상한 낌새를 느껴 다시 이정표가 있는 원점으로 되돌아 왔더랬다. 우포의 동편을 따라 대대제방을 걷는 동안 몸속에 시나브로 자라난 나침반은 소야마을 방면으로 가라고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정면에 높다란 산을 두고 걷다보니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산을 향해 나아갈수록 습지와는 분명 더 멀어질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왔던 길을 과감히 되돌아갔다. 지금처럼 GPS나 정밀한 지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길을 찾았을까. 휘하에 수 백의 병사를 거느린 장군이 갖춰야 할 지략(智略)에는 이러한 지리적 이해 또한 포함되어 있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지포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고 가장 좋았던 공간. 이 습지는 자기의 이름을 갖고 있기나 할까. 그나저나 저 꽈리모양 잎사귀를 달고 있는 이 이름 모를 나무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내 마음을 깊은곳까지 어루만져주는 것 같다. 이곳 우포늪 일대에 참 많았던 이 나무. 나는 이 나무가 영원히 나의 벗이기를 바랐다. 이제는 사람에 실망할 것도 없는 나이에 가까워졌지만, 그렇게 무디게 지내다가도 나라는 존재의 겉옷을 내려 놓는 순간 내 안에 남은 흉터와 통증에 종종 놀라곤 한다. 한 그루 나무도 언젠가는 죽지만 나 역시 이 과묵한 벗의 벗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시초소 일대에서부터는 상당히 길을 헤맸다. 길바닥에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풀잎의 상태로 보아 제초(除草)를 한지 꽤 된 듯했는데도, 풀내음이 지독하다 싶을 만큼 코를 찔렀다. 우리는 흔히 '까마득함'이라는 이미지를 '흑(黑)' 또는 '백(白)'이라는 색감과 연결짓지만, '녹(綠)' 역시 때로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찔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황혼녘 어둠을 서슴없이 주위 풍경을 빨아들이는 초록, 나보다 더 생명력을 뿜어내는 초록의 무리, 그리고 초록의 냄새. 그런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닥치는 이 오솔길이 아무렇지 않은듯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계곡물이 내려가는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습지에서는 그러한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 정말 길을 잃은 것 같아 바로 옆 습지를 보지만 수면 위로 어떠한 미동(微動)도 확인할 수 없다. 파동(波動)이라 할 만한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표면 위에 고요히 이는 잔물결 뿐.
가시연꽃마을 어귀에 이르러 발견한 이 카페는 그야말로 유레카!!였다. 아니 논과 밭 뿐인 이 지역에 정말 뜬금없이 자리잡고 있는 이 카페. 아마도 아는 사람들만 찾는 곳인듯, 이곳에서 햄버거나 샐러드를 먹는 가족 일행도 여럿 보였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토마토 스무디 하나와 에스프레소 하나를 주문했다. 토마토 스무디는 거의 한 번에 들이켰던 것 같다. 에스프레소는 카페인을 충전할 겸 몇 모금씩 나누어 마셨는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갈증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커피의 향을 운운했던 것을 보면 아직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15분 머물렀을까, 마음 같아서는 평화로운 이 오아시스에 5분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길을 서둘러야 했다. 입장을 할 때 풀 트레킹 코스가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했는데, 아직 코스의 절반도 오지 않았음에도 2시간 반을 들였던 것이다.
사지마을에 접어들어서도 몇 차례 길을 잃었다. 전망대 방면으로 갔다가 길을 찾지 못해 산길을 다시 내려와 과수원 외곽을 따라 길을 걸었다. 대학 2학년 제주도에 올레길이 막 생기기 시작하던 때에 올레길을 따라 걷던 생각이 났다. 군에서 훈련 받을 때 완전군장을 하고 몇 박에 걸쳐 행군을 하던 생각도 떠올랐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티벳 신자들의 모습 역시 떠올랐다. 나는 늘 '걷는 것'에 대해 애정이랄지 집착이랄지 그와 비슷한 감정을 가져왔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것은 아마도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였던 것 같은데, 더 정확히는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는 답답함 때문에 그 모르는 지점 자체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농가의 차양막 아래 라디오에서 리듬감 있는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지포에서 시간 손해를 보면서 의외로 길을 서두르게 되었는데, 주매제방에서 빠져나오는 길에서는 약간의 지름길을 택했다. 하지만 지름길을 택했다가도 이내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오는 일을 반복했다. 우리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지만 옳은 길이 있다면, 잠시 샛길에서 길을 잃었다 하더라도 금새 옳은 길로 되돌아올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매제방을 지나 완전히 사지포에서 빠져나오면, 목포(나무벌)의 길은 비교적 순탄하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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