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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습지 "소벌(牛浦)" : 뻐꾸기 울음을 벗삼아..여행/2019 한여름 창녕 2019. 7. 10. 01:01
창녕으로 가는 길은 괴로울 만큼 지루했다. 늘 그렇듯 금요일 저녁 수도권 고속도로의 교통상황은 좋지가 않다. 게다가 약간의 판단 착오가 겹쳐 경유지인 대구까지 가는 시간을 과소평가했다. 대구에 도착할 거라 예상했던 밤 9시 반, 내가 탄 버스는 괴산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버스에 내려 깊이 한숨을 돌리니 한여름의 습기가 무자비하게 목청으로 밀려든다. 경상도 지방을 갈 때는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기차를 이용했어야 한 건데, 에어컨 바람이 빵빵한 버스 안은 오히려 답답하기만 하다.
창녕행을 얼마나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가. 늪의 이미지는 이내 땅거미가 지는 고속도로의 풍경과 맞닿았다. 그리고 잠시 심해(深海)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내가 탄 버스는 사실 땅 위가 아니라 바다 밑을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짙어질 수록 수심은 점점 깊어진다. 차창을 스쳐지나가는 가로수가 바닷속 조류(藻類)처럼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밑동부터 새까맣게 나무를 채워 올라가는 어둠은 이윽고 내 마음 한켠에 똬리를 틀었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내륙지방을 여행해본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창녕만큼 교통의 혜택으로부터 빗겨난 곳도 참 드문 것 같다. 내가 구상한 경로는 서울→대구→창녕 시내→우포늪이었다. 최상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나는 금요일 밤 창녕 시내에까지는 떨어져 있어야 했다. 목적 있는 여행은 때로 거추장스럽다. 우포늪은 어떤 식으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다라야 하는 목적지였고, 시간을 절약하는 일은 잠시 우선순위에서 미뤄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괴산에 정차했을 때 그 갑갑함이란..
일찌감치 최상의 시나리오를 접고, 버스가 나를 반월당 앞으로 바라다 주었을 때 곧장 숙소로 향했다. 숙소를 찾는 것마저도 자세히 알아볼 의욕이 없어서 검색결과 중 가장 상단에 올라온 숙소로 정했다. 주로 외국인이 묵는 이 호스텔은 도미토리 형태의 저렴하고 단촐한 숙소였다. 의외로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잠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꿈속에서 나는 혀를 내두를 만큼 출중한 (정확히 어떤 면에서 출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과 밑도 끝도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오전 9시 반쯤 눈을 떴을 때 호스텔에서 제공되는 조식시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한 주간 업무에 시달려 지친 상태여서 그랬는지, 배를 곯는다는 의식도 없이 짐을 싸자마자 곧장 체크아웃을 했다. 반월당역에서 설화명곡 방면 열차를 타고 서부정류소에 다다른 시각이 오전 10시 반 경. 두 번째 방문한 대구는 더위에 가뜩 짓눌려 있기는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 특유의 강단(剛斷) 넘치는 활기는 내게 이 도시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想起)시킨다.
터미널 앞에서 현금을 인출한 뒤 간단히 햄버거로 요기를 하고 (대구까지 와서 햄버거라니!!ㅠ) 창녕 행 버스에 올라탄 뒤 30여분이 지났을까 창녕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차로 고작 30분 거리를 건너오는데 심리적 거리는 왜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지 그 까닭을 미처 헤아려볼 틈도 없이, 우포늪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읍내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다음 읍내버스까지는 1시간 40분이 남았다. 그렇다, 나는 20분 전 떠난 버스를 놓쳐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터미널 앞 검정색 택시에 올라타고 만이천 원을 지불했다. 이 모든 환승작업은 매우 기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말인데도 관광지인 이곳이 한산한 이유는 이런 심리적 거리감 때문일까. 대부분의 방문객들도 말투로 미루어보건대 멀리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대체로 근처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다.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으니 택시비에서 발생한 예상밖의 손해를 메웠다 생각하며 우포늪 보호구역에 발을 들였다. 나는 오로지 '걷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자전거를 따로 빌릴 필요도 없다. 자전거를 빌려서는 고작해야 우포늪(소벌), 그 안에서도 대대제방 정도밖에 보지 못한다. 나의 계획은 사지포(모래벌)와 목포(나무벌)를 포함해 모든 습지 일대를 트레킹하는 것이었다. 안내 표시판에는 대략 3시간 반 코스로 소개되어 있었는데, 쪽지벌과 산밖벌까지 다 둘러봤다는 점을 감안해도 총 6시간이 걸리는 코스였으니 상당히 방대한 습지임에는 분명하다.
J에게 창녕 간다는 얘기를 했더니 봄가을에 가지 왜 이 땡볕에 가냐는 조소 섞인 답이 돌아왔다. 늘 대화는 이런 식이다. 물론 봄가을에 오면야 이상적이겠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이 순서를 만들려다 아무런 순서도 지킬 수 없게 되는 법이니..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여유가 정말로 없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둘러댔다.
사실 여름 우포늪은 오히려 바로 옆 싱그러운 논밭이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풍경이 대단하지는 않다. 모든 것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무성(茂盛)하다. 무성해서 단조롭기까지 하다. 모든 것은 이 '늪'이라는 공간 안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로지 '무성함'이라는 개념 안에서 뭉뚱그려질 뿐이다. 이 거대한 원칙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늪으로부터 뭍으로 무언가를 건져내 보려고 늪의 표면을 어설프게 더듬는다.
우포늪은 시각만큼이나 청각이 환기(喚起)되는 곳이기도 하다. 웬 새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는다. 실성한 사람도 아니고 정확히는 실성한 사람을 작심하고 연기하는 새처럼, 그 우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귓전에 내리꽂힌다. 처음에는 양서류가 잡아먹히는 소리인가 해서 소리가 나는 곳을 시선으로 좇아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새가 내는 소리이기는 하나 사실 이마저도 정체가 불분명하다.
좀 더 귀를 기울여 보니 뻐꾸기 울음이 들려온다. 뻐꾸기의 울음이야말로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바로 옆에서 높다란 나무를 드리운 나뭇잎들이 바람에 제법 거세게 나부끼며 시원한 마찰음을 낸다. 그리고 옆사람을 따라 휴대폰으로 소리를 담아본다. 토평천이 빚어낸 우포늪은 1억 년 하고도 4천 년이 더 된 곳이라고 하니 시간을 광년(光年)으로 헤아려도 될 정도다.
창녕은 화왕산의 고장이기도 한데 내가 걸은 길(대대제방)은 (우포늪 보호구역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화왕산으로 이어지는 곳은 아니었고, 다만 비슬산을 병풍삼아 시원하게 펼쳐진 논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길이었다. 차를 타거나 기차를 탈 때면 종종 창 밖으로 바라다보이는 논밭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전신주가 투박하게 포장된 도로의 방향을 느릿느릿 이끌고, 연록이 울창함으로 바뀌어 가는 녹색의 풍경 안에서 나를 파편 삼아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대제방 위를 걸으며 다시 한 번 강렬히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다. 차라리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막연했던 생각은 분명한 생각이 되어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면서, 바로 그러함으로써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에 이르렀다.
풍경이 단조로워지는 것 같으면 기괴한 동물의 울음소리에 놀라고, 온갖 동물과 곤충의 울음소리에 익숙해진다 싶을 땐 길이 꺾인다. 어느새 사지포(모래벌)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사지포제방 대신 가시연꽃마을로 방향을 택한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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