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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다섯 번째 습지 "쪽지못과 산밖벌" 여행의 마무리여행/2019 한여름 창녕 2019. 9. 7. 21:29
쪽지못은 우포를 이루는 늪지 가운데 유일하게 순우리말로 된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또한 '벌' 대신 '못'이라는 작은 명칭을 가지고 있다. 규모가 작다보니 나무벌(목포)과 쪽지못의 경계, 쪽지못과 산밖벌의 경계는 모호하다. 머리속으로 구상하기로는 쪽지벌을 절반쯤만 걷고 사초군락지를 통해 다시 우포늪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문제는 사초군락지로 접어드는 징검다리가 절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는 점. 사초군락지는 말 그대로 늪지 한가운데 여러해살이풀(莎草)이 무리지어 자라나는 곳으로 풀 뿐만 아니라 나무가 우거진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늪지의 수위가 높아지면 진입이 금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우포늪을 걷는 동안 마주한 관광객이 많지 않고, 특히나 나무벌(목포)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관광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사초군락지로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가는 인적도 전혀 없었고 이 큰 보호구역에 아무런 통제도 이뤄지지 않아서 지름길이기도 한 사초군락지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저 늪은 생각한 것 이상의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초군락지를 거칠 수 없다면 산밖벌 가장자리로 한참 길을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걸어야 하는 길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여행을 마무리하길 기대하고 있던 시점에 여행길이 늘어나다 보니 맥은 빠졌지만, 길이 늘어났기 때문에 발걸음은 서둘러야만 했다. 이 즈음부터는 딱히 여행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더위를 이겨내며 부지런히 걷기만 했다. 쪽지못은 나무벌이나 소벌(우포)와는 달리 광활한 느낌은 적고 오히려 아기자기하다. 늪지 위로 누군가가 눈싸움을 벌인 것처럼 나무 몇 그루들이 아무렇게나 똬리를 틀고 있고, 나무 발치로는 무성한 수풀이 나무그늘과 구분되지 않은 채로 어수선하게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짙은 수풀은 벤다이어그램처럼 일정하게 동심원을 그리는 것 같다가도 그 경계가 또 다른 수풀 무리에 의해 헝클어진다.
소담한 제방길을 잠시 걸었던 것 같다. 점점 더 길이 정돈되는 것 같더니 산밖벌이 모습을 드러낸다. 쪽지못은 모래벌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아기자기함을 보여준 늪지였다. 수미상관이라고 해야 할지 산밖벌로 접어드는 제방길은 우포늪에서 걸었던 대대제방만큼 탁 트이고 쾌적한 길이었다.
하지(夏至)를 넘겼다는 사실을 너무 의식한 탓일까,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것만 같다. 나무와 수풀의 초록빛도 성질이 바뀌어 갔다. 모래벌을 걸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오아시스 같던 카페에 다다르기 전까지만 해도 나무와 수풀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을 한껏 누리는 모양이었다면, 해질녘이 되니 차분하게 숨을 고르는 모양새다. 이처럼 시간은 흐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품고 있는 존재들의 빛깔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황혼(黃昏)이 부럽다.
산밖벌로 넘어가는 길에는 출렁다리가 하나 놓여 있다. 뜻밖에 몇 명의 행인을 발견했는데, 이곳 주민인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위에 논밭은 보여도 마을은 보이지 않는데 이곳까지 먼 길을 걸어서 온 것인지 모르겠다. 주인을 졸래졸래 뒤쫓는 강아지가 길게 혀를 늘어뜨리며 더위를 쫓아내는 모습이 귀엽다.
산밖벌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마치 디오라마처럼 늪지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된다. 산밖벌은 그간 난개발로 인해 자취를 감췄던 우포늪 일대의 크고 작은 늪지들을 보존하고자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늪지이기 때문이다. 나무도 아직 묘목들이 많이 보이고, 인위적으로 심어진 꽃과 풀들이 보인다. 특기할 만한 점은 길이 매우 잘 닦여 있다는 점인데, 산책로에 아예 우레탄을 깔아놔서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다. 정자(亭子)며 운동기구며 공원처럼 잘 가꿔져 있지만,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 궁금해질 만큼 인적이 없다. 어쨌든 나는 산밖벌은 왼쪽으로 끼고서 반듯한 산책로를 편안히 걸을 수 있었다.
산밖벌이 끝나는 지점과 마을길로 이어지는 지점이 약간 어지럽게 분기(分岐)돼 있어서 길을 찾기가 헷갈리는데, 휴대폰으로 잠시 내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도 제대로 길을 들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늪지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고는 하지만 꽤 복잡한 동선으로 트레킹을 했다. 우포에서 사지포로 향할 때는 북동 방향으로 직진을 하다 목포로 넘어가기 위해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목포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정북 방향으로 향했다가 다시 비스듬하게 남쪽으로 내려왔고, 쪽지벌 이후로는 다소 난해하게 길을 바꾸어가며 걸어나갔다.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온 뒤에는 매점에서 냉수와 빙수를 사서 마치 메마른 스펀지처럼 흠뻑 들이켰다. 창녕 읍내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버스는 오후 여섯 시 반. 아직까지는 30분 이상의 여유가 남아 있다. 우포늪 보호구역 초입에는 깜냥 제법 있어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는 내 곁에 다가와 새초롬하게 자리를 편다.
적적하지 않게 버스를 기다렸고, 이윽고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을 때 나이 지긋한 버스 아저씨께 물었다. 아저씨 '창녕' 가나요? 아저씨가 잠시 질문의 의미를 곱씹는 것처럼 시간을 두더니 그렇다고 한다. 왼편에 차창을 두고 자리에 앉았는데, 좀전의 내 질문이 참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미 창녕에 들어와 있는데, 창녕으로 가냐니~_~
우포늪을 하나의 지명처럼 생각한 나머지, '창녕 읍내' 아니면 '버스터미널', '읍내'로 가냐고 묻는다는 게 그냥 '창녕'으로 뭉뚱그려 버린 것이다. (우도(牛島) 당일치기 여행을 마치고 성산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무턱대고 제주시 가는 길을 찾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이치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다.. 창녕군 안에도 읍이 있고 면이 있고 리가 있거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도 바로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만 아는 방식으로 소통을 했다. 쏟아지는 햇빛과 덮쳐드는 초록(草綠), 그리고 인간의 덧없는 말말말(言). 나는 창녕 행에서 무엇을 얻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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