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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전(消耗戰)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2. 14. 12:57
# 나는 그리 세련된 사람이 아닌지라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하는 편이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겉보기와 다르다고도 한다.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작년 10월부터 계속해서 시달렸던 인건비성 경비 문제가 있다. 온갖 미스커뮤니케이션으로 점철된 이 업무—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조직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이를 주관하는 재무부서가 따로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경비 문의가 인사 업무를 보고 있는 내게 쇄도했다. 이때 제대로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연말에 그렇지 않아도 다른 업무들이 쌓여 있어서 하나하나 따질 겨를이 없었다. 결국은 사달이 났다. 모두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이 이 인건비성 경비가 전사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이다. 상대 회계팀은 시종일관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였고, 참다 못한 나는 맨 먼저 업무적으로 접촉했던 실무자에게 전화를 걸어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언성도 높였던 것 같고, 그랬기에 상대도 지금 싸우자는 거냐고 반문했을 거다.
사실 일개 대리가 나서서 목에 힘을 줘본들 사태는 달라지지 않고, 또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잠자코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붉으락푸르락하며 전화를 걸었던 건, 심지어 상대 실무자라고 해봐야 나보다 고작 몇 년 더 일한 대리임에도 굳이 목에 핏대를 세웠던 건, 이게 내가 속한 조직에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화기 건너편의 대리는 아주 기계적으로, 마치 자동응답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래서 뭘 해드리면 되는 건가요, 라며 무미건조한 답변을 반복했다. 그가 최대한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대하려 애썼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야말로 흥분했던 것일까. 다만 1년의 4분의 1이 지나는 동안 수수방관한 채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해왔던, 그러면서도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던 이 조직의 만행(蠻行)에 대해 팀원 중 한 명인 그가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조직의 실패다. 안타깝다, 조직에 기생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왔다. 그들도 그들의 사정이 있겠지, 함께 일하는 부차장들과 있을 때 그런 얘기를 한다. 내 통화를 옆에서 듣던 최고참 부장은 잠시 흡연장으로 가자더니, 구성원 모두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걸 잘 알고 있고 혹시 나 역시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예의 뜨거운 감자에는 관련된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지금 차출된 TFT 안에서 전혀 다른 인사업무를 보고 있는 차장들까지 입에 욕을 달며 며칠을 통으로 시달리고 있다. 담배도 피지 않는 나를 흡연장으로 데려온 부장은 내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눈치다.
회사가 어렵다고 하면 나 역시 내 월급이나 성과급에 영향이 있을까 먼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속한 조직이 잘 되었으면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 조직 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다. 그래, 그들도 그들의 사정이 있었겠지. 분명 내가 오늘 역정을 냈던 상대 대리도 본인이 전권을 쥐고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는 않다. 진흙탕 같은 수렁에 빠진 사태에 해결을 촉구하려는 생각은 좋았지만 접선지를 잘못 찾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그 사람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수 있다. 그리고 평소의 나는 상대에게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인건비와 맞물린 인사업무를 하면서 만성적으로 번아웃이 된 것 같다. 일을 해놓고도 책임을 전가받는 상황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 훌륭하게 일을 해내는 선배들도 있고, 지금같은 경제침체기가 아니었을 때 한창 자긍심을 갖고 일해왔던 선배들도 보여서, 그런 그들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지만, 조직을 방패 삼아 안돼, 못해, 너희가 해, 난 몰라, 하며 노련하게 업무를 방기(放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적어도 제 몫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 몫조차 안 함으로써 타인이 몫 하나 해내는 것까지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 말이다.# 홍콩야자는 기르기가 까다롭다. 자취방에 두 그루의 홍콩야자를 키우는데, 특히 한 그루의 홍콩야자가 약간 비실비실하다. 홍콩야자는 줄기 끝에 여러 개의 잎사귀가 방사형으로 돋아나서 장식적인 느낌이 나는 식물인데, 보통은 같은 줄기에서 돋아난 잎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멍든 것처럼 검게 변한다. 특히 새순이 취약하다. 이게 과습 때문인지 온도 때문인지, 물을 덜 줘보기도 하고 더 줘보기도 하고, 아니면 난방이 잘 닿는 바닥에도 놓아보고 좀 떨어진 책장 위에도 놓아봤는데 원인을 잘 모르겠다. 햇빛은 적당히 잘 들어서 채광이 문제는 아닌 것 같고, 해충 때문인 건가 해서 샅샅이 봐도 벌레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옆에 있는 몬스테라는 잘 자라는데 홍콩야자만 관리가 어렵다. 귀가하고 잎사귀가 하나씩 검게 변해 있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인데, 그만큼 전날까지는 멀쩡하다가 (출근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다) 반나절 사이에 꼭 연기하는 것처럼 시들어 있곤 한다. 시든 잎을 떼려고 하면, 마치 시각적으로는 존재했지만 질량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잎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영양분이라도 넣어줘야 하는 건지 뭐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어서 영양제를 사기 위해 꽃집에 갔다. 엑기스로 된 액체를 사려고 했었는데, 토끼똥보다 작은 크기의 동글동글하게 생긴 퇴비를 권해주셨다. 설명을 들어보니 엑체로된 영양제는 엑기스가 아니라 그 반대로 양분을 희석시켜 놓은 것이라 한다.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시면서 빗물을 받아다가 중금속을 가라앉힌 뒤 정화된 빗물을 줘보라고도 권해주셨다. 망간, 마그네슘, 아연 같이 자연에서 어렵지 않게 섭취될 수 있는 것들이 가정(家庭) 안에 들어오면서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게 되자 적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첫 방문에 염치도 없고 몸도 피곤해서 그냥 가게를 나왔다. 어제 퇴비를 주고 일찍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홍콩야자가 호박죽이 되어 화분에 담겨 있는 꿈을 꿨다. 공포의 감정을 느끼는 꿈이란.. 아침에 일어나보니 예의 홍콩야자가 더 축 늘어져 있다. 안 되겠어서 홍콩야자가 자라기에는 쌀쌀한 날씨지만 베란다에 내놓았다. 다른 한 그루의 홍콩나무는 초주검이 된 동족으로부터 무풍지대에 있는지 여전히 쌩쌩하다.
# 며칠 전 야근하고 새벽 퇴근길에 택시에 올라타다 휴대폰을 아스팔트 도로 위에 떨어뜨렸다. 하필이면 화면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액정에 금이 갔다. 이 휴대폰을 아마 2015년 말이었나 2016년 초에 샀던가, 아무튼 5년째 쓰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쓴다고 썼는데도 이렇게 됐다. 오래 쓰려고 배터리도 갈아끼운지 얼마 안 됐고 요새는 스피커도 약해져서 스피커도 갈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래 쓰다보니 이 기계에 길들여진 감이 있어서 계속 쓸 것 같다. 왼쪽 아래가 살짝 깨져서 화면을 보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휴대폰을 용산의 한 업체에서 수리받을 때, 휴대폰을 오랫동안 깨끗하게 잘 썼다고 예의상 이야기하며, 여자가 수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모르셨죠, 라며 너스레를 떨던 여직원이 갑자기 떠오르는데, 너스레를 떨 때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고 그 와중에 분주히 움직이던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은 손톱만이 기억에 남는다.
# 옥탑방 아닌 꼭대기층—정확히는 대각선으로 반층 위에 옥탑방 아닌 집이 하나 더 있다—에 살고 있는데, 집 위에 아무 공간이 없을 것 같은데 늦은 밤이 되면 가끔씩 가응~가응~하는 소리가 난다. 처음에는 그냥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같은 기계음인 줄 알았는데, 아주 최근 들어 이 소리가 고양이 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혼자 밖에 나와 살다보니 아무래도 밥을 부실하게 먹는다. 배곯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야근을 하면서 밥먹듯 밥을 거르고, 밥먹을 시간이 있어도 쌀국수나 라면처럼 간편식을 찾게 된다. 그런데도 몸에 탈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젊은 건지, 맷집이 생긴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던 중 오늘 이렇게 몸살이 심하게 왔다) 혼밥은 어색하지가 않은데, 사실 배곯는 것만큼이나 밖에서 먹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바깥음식은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집밥과 다르게 먹고나면 입도 텁텁하고 속도 개운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매번 엄선된 메뉴로 혼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정체가 분명해 보이는(?) 쌀국수나 라면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하루는 모처럼 정시퇴근(칼퇴라는 말은 웃프다)을 하고 예전에 봐뒀던 비건 레스토랑—가게 이름이 '숟가락'의 일본식 발음인 '수카라'다—을 갔다. 소극장 위에 있는 이 가게는 저녁에 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관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서 손님도 없겠거니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만석이었다. 다행히 나처럼 혼자 온 손님들이 여럿 있어서 금방 자리가 났다. 메뉴소개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계절음식을 시켰다. 미식가는 아닌데, 위와 같은 이유로 오래되거나 혹은 장기간 냉동되었거나 방부제가 듬뿍 들어갔거나 화학조미료에 절어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유전자에 손을 대지 않은 재료만 써도 감사할 따름인데 사실 현대사회에서는 이들 요건 중 하나를 갖춰달라고 하는 것만도 과욕이라는 걸 잘 안다. 여하간 모처럼 '속이 편한' 식사를 해서 좋았다. 최근 읽은 책 중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첨단 무기보다 '병참'이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데, 과장을 보태 전쟁 같은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에너지를 얻고 간다. 병참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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