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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전 : 忙 그리고 忘 사이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9. 8. 1. 00:56
# 은행업무를 보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대기표를 뽑고 기다렸다. 업무마감 시각 10분 전 슬슬 초조해질 즈음 내 순번이 돌아왔다. 업무를 보며 짧은 대화가 오갔는데 직원이 말하길 내가 보려던 업무를 모바일로도 볼 수 있단다. 괜히 오래 기다리신 것 같다길래, 한 술 더 떠 이 업무를 보려고 반차까지 냈다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요새 행원을 줄이고 있다는 직원의 얘기까지 이어졌다. 그 덕에 유달리 손님이 많은 이곳 지점에서는 대기시간이 155분까지 기록한 적까지 있다고. 아닌 게 아니라 얼마전 집 앞의 은행 지점이 문을 닫았다. 은행업무 스마트화의 일환이란다. 사실 요새 대부분의 업무를 모바일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은행에 갈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모든 것에 효율화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요즈음, 업무가 간편해져서 좋은 건 사실이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무언가가 빠른 속도와 효율화라는 움직임 속에 얼렁뚱땅 얼버무려지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 어쩌다 서울역과 가좌역 사이를 지나다닐 때 신촌역 즈음에 철교 위에서 연세대의 백양로를 내려다보는 일은 퇴근길 소소한 즐거움이다. 나와 개인적으로 무관한 공간임에도 바로 그러한 무관함 때문에 더욱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 일본은 늘 가깝고도 먼 나라였지, 멀고도 가까운 나라는 아니었다. 일본이라는 고유명사는 ‘가깝다’는 형용사보다 ‘멀다’는 형용사가 더 가까이 어울린다. 사실 우리나라가 일본이랑 긴밀했던 적이 있기나 했나 싶다.
# 돈이 아니면 가치를 헤아리지 못하고 죽음의 무게는 깃털만큼 가벼워졌다.
# 동물이나 곤충을 좋아한다. 뱀류랑 바퀴벌레, 지네만 빼고. 여하간 처음으로 동물을 키워본 게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하굣길 학교앞에 어떤 할아버지가 종이상자안에 샛노란 병아리들을 담아와 앉아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단돈 500원을 건네고서 병아리를 데려왔더랬다. 며칠이나 키웠을까 비실비실대던 병아리가 눈 주위에 지저분한 이물질을 달고 껌벅거리는가 싶더니 어느날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볏은 커녕 노란털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앳된 병아리였다. 아파트옆 화단에 동생과 함께 병아리를 묻으며 한참을 울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해 처음 겪은 슬픔이었다. 몇년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거북이를 두 마리 키워보았다. 마찬가지로 몸집을 키워보기도 전에 거북이들의 활동량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거북이를 키우는 수조에는 녹조가 자랐고 단단해야 할 거북이의 등딱지는 점점 더 물렁물렁해졌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이번에는 이전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머릿속에서 그리던 것처럼 생명이 자라나지 않는 데 대한 당혹감과 또한 함께할 수 없을 때 느끼는 공허함을 명료히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세 번째로는 토끼도 키워보았는데 이번에는 대단히 순조로웠다. 시레기나 상춧잎을 주면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먹어치우는 속도만큼이나 배변량도 엄청났다. 토끼를 키우던 베란다가 사육장에 가까울만큼 분뇨 냄새로 가득해질 즈음 우리는 토끼를 데려온 곳으로 다시 토끼를 되돌려 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토끼가 그 뒤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원해서 동물을 데려왔다 불편하니 되돌려놓는 행동이 매우 이기적이라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어린 마음에 미숙하나마 현실적인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끝으로 지금 키우고 있는 강아지는 그때의 토끼보다 훨씬 먹성이 좋고, 심지어 성격도 괄괄하다. 얼마전 가족여행 준비로 부재중인 동안 강아지를 돌봐줄 펫시터를 알아보았는데, 펫시터와의 사전만남에서 이 녀석이 기어코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고 말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녀석을 제지하기 위해 크게 고함을 쳤다. 집에 방문오는 펫시터가 아닌 펫시터 가정에 반려견을 위탁하려던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먼저 맡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펫시터는 성격 좋게 웃어넘겼다. 나는 잠시 민망했다가 이내 맥이 빠졌다. 이 녀석을 케이지에 넣어 힘들게 이끌고 이 무더위에 한 시간을 걸려 왔는데...사실 그보다는 이 녀석의 사회성을 어떻게 길러야 할지...방문했던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망연히 아이스크림바 하나를 입에 물었다. 지독히도 더운 날씨였다.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옆에 앉아 혀를 내밀고선 숨을 헐떡거린다. 가끔 이 녀석의 눈동자를 들어다보면 나와 어디서 접점을 찾아야 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데..결국 반려동물을 애정만으로 키우는 게 아닌 것이다.'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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