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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 덤불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8. 10. 23. 23:26
# 문득 떠오른다.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회색인간이야. 헤르만 헤세의 책에 빠져 그의 작품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뜬금없이 회색인간? 너는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고 강건너 불구경하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거든. 결코 무엇도 하지 않지. 그게 그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 같다. 간사이 여행도 함께 할 만큼 믿음이 갔던 친구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간 뒤로, 친구와 제대로 나눈 마지막 대화는 아직도 종종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이후 5년 뒤인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그 친구를 마주했을 때 나는 짤막한 인사만을 남기곤 황급히 갈길을 재촉했었다. 그때는 아무런 예고없이 수년간 친교(親交)를 끊어버린 그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우연히 찾아온 반가움을 반사적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나 역시 단호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회색인간. 철없던 당시 그 친구는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나라는 사람을 정의내렸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 역시 내가 회색적이라는 데 공감한다. 변화에 나서는 것 같으면서도 지금 이대로를 즐기는 권태. 열정에 내재된 우울함을 외면하는 무책임함. 애정인지 동정인지 호기심인지 알 수 없이 대상 가까이서 맴돌기만 하는 오만함.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려는 어리석음. 소명 또는 개인적 영달 그도 아니라면 생계를 위해서 직(職)을 짊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우둔함.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내 면면들은 나의 그늘진 회색 그림자를 충분히 방증한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방치(放置)하고 있는 나는 그 친구의 말대로 과연 회색인간이었다. 사실 색을 붙이려다보니 회색이라는 단어를 끌어왔을 뿐, 나를 표현하는 데는 ‘무색’이나 주어진 상황에 따라가는 ‘보호색’ 또는 모든 빛을 튕겨내는 ‘흰색’ 정도가 알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회색인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모욕감 같은 것이었다. 그에 반해 그 어떤 것이라도 빨아들일 것 같았던 그 친구야말로 어느 색으로도 명명하기 힘든 부류의 친구였다. 그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던 것도 3년 전. 3년 전의 일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 친구가 내게 남겨놓은 시간적 공백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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