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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말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4. 9. 00:55
# 두 시간 정도 남아서 일을 하느라 퇴근이 늦어졌다. 계획을 세운다면 충분히 시간을 줄여서 할 수 있으련만, 계획을 그렇게 세워대는데도 그 계획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남아서 일을 한다. 여하간 곧 어디에 처박혀 하루이틀 뒤면 찾지도 못할 그 계획들을 세우느라 저녁식사도 늦어졌다. 조금이라도 회사랑 거리를 두고 싶어서 전철에서 보내야 할 시간을 감수하고 아예 집 근처로 가서 밥을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혼자 따로 나와 살다보니 집근처에 나만의 단골가게를 넓혀나가는 재미도 있지만, 오늘은 그것도 귀찮아 라면에 밥으로 때우려고 라면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입구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네 명의 남자 청소년 무리가 눈에 보인다. 기껏해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나이다. 테이블 위에 그릇도 여러 갠데 얼추 비워져 있길래 곧 나가겠거니 했다. 더 정확히는, 묘사하기도 귀찮을 만큼 막된 욕을 뱉어내는 이들 무리가 빨리 자리를 떠줬으면 했다.
쉼없이 자기들끼리 욕을 하면서 또한 쉼없이 가게집 주인이랑 소통을 시도한다. 하도 분주하고 어수선해서 상황을 지켜보니 일행 중 한 명이 부모를 그 라면가게로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가게 아주머니를 중개인 부리듯 메뉴를 주문했다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입금을 하든 주인장에게 입금을 하든 하라고 잡다한 지시를 내렸다가 하는 걸 보니 가출 청소년 같기도 한데, 가게로 전화를 건 부모를 보면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얘기인데 바로 못 달려오는 건지 이 지역에서 먼 곳에 사는 탕아들인가 싶기도 하고 짧은 시간 안에 별 추측을 다 했다. 전화기 너머 아버지에게 담배 살 돈을 달라고 윽박질렀다가, 전화를 끊자마자 그 전화기를 도로 가지러 온 가게 아주머니에게 자기 아버지가 도무지 좀 더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둥 점입가경이었다. 부모는 그나마 식당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모양인지, 먹는 거에는 입금을 해주고 담배에는 입금을 안 해주고 있는,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알뜰살뜰한 모바일뱅킹의 시대다.
내 귀를 어떻게 하고 싶을 만큼 듣기가 너무 거북한데 그렇다고 나서지도 않았다. 다만 차마 사람의 입이라 할 수 없는, 아주 일사불란하게 나불대는 입술 두 짝을 보면서, 그 입이 정말 내가 아는 그 입이 맞다면 인간의 입에서 말을 싹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심으로. 아니면 내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우리 모두 손말(手話)를 배우자. 그러자 뒤따라오는 생각. 저 녀석은 수화를 배워도 수화를 아주 잘못 쓰겠어, 이번에는 입술 두 짝 대신 두 손에 두 주먹 꽉 쥐어들고 보란듯이 사람들을 패고 다닐 녀석이야. 내가 가게를 나설 때에야 이들의 호기로운 만찬이 끝난 모양이었다. 실로 정신사나운 저녁, 실로 아슬아슬한 저녁이었다.
# 나에게 본가에서 지내는 강아지는 친구 이상으로 엄연한 가족이다. 워낙 아끼다보니 본가에 들를 때마다 강아지에게도 사람 같은 마음이 있어서 내 마음을 헤아려줬으면 하는 생각을 할 정도다. 강아지가 이해하지도 못할 실없는 말을 걸고, 가끔은 강아지의 행동을 흉내내는 유치한 장난까지 한다. 그런 나의 가족을 험담하는 것은 정말 쓰라린 일이지만 우리 강아지는 자주 으르렁거리고 이빨을 드러낸다. 또 그 이빨의 힘을 과시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그러니까 입질을 한다.) 반려견 훈련사가 등장하는 프로에 도맡아 나오는 그런 개들처럼, 우리 강아지도 성격이 꽤 고약하다. 강아지의 이빨에 물려서 피를 흘린 적이 여러 번이다. 대개는 손, 때로 정강이, 저번 한번은 입술까지 물렸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팔불출처럼 강아지를 마냥 아낀다. 개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외모가 멋진 수컷이고, '중성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거세수술에 반감이 너무 커서, 최대한 있는 모습 그대로 살게 두었다. 지금같은 철부지 티만 벗어난다면 교배도 알아보고 싶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의 짧은 생각에서 나온 결정은 아니었다. 또한 아끼고 돈다 해서 훈육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강아지가 사람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그게 어렵다면 나라도 강아지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다. 그만큼 강아지가 내 통제에 잘 따르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강아지의 표현 방식을 설명해놓은 글들도 많고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실천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강아지를 자꾸 사람 대하듯 대하는 나의 문제가 제일 크다며 동생이 힐난할 때마다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럼에도 나는 반려견이 온전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앞선다. 어느 노랫말처럼 강아지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빨리 흐르므로, 인간 사회에 들어왔기에 당연히 에티켓은 지켜야 하겠지만 개가 개다울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다. 하지만 작은 부주의로라도 타인에게 해를 가한 적은 결코 없다.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부채의식이랄까 또는 죄책감 같은 게 있다. 사실 집안에 맨처음 강아지를 들이고 싶다고 한 건 동생이다. 그때까지 나는 동물이 사람집에 들어와 산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조금 유교적인 표현이지만 동물은 동물답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생이 워낙 오랫동안 의견을 끌어왔기 때문에 강아지를 분양하는 곳에 동행했다. 그리고 지금의 강아지를 들였다. 말이 그럴듯하게 '분양'이지 나의 소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주고 생명을 거래한다는 것이 가장 꺼림직했다. 반려동물에 지금만큼 관심을 두던 때가 아니라서 입양에 대해 해박하지도 않았지만, 반려자로서 함께하는 동물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면 분양보다 입양을 하는 게 훨씬 바람직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녀석의 삶에 이렇게 해서 끼어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보다 더 내 부채의식을 부추기는 건, 분양하는 곳에 갔을 때 동생이 오랜 기간 지켜봐왔던 푸들 대신에 백구를 닮은 요 녀석을 데려왔다는 사실이다. 뭔가 제대로 생각을 틀에 넣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엄마는 분양을 할 거라면 이 백구를 들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당 있는 집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꿈 속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런 의견을 주고 받았더랬다. 지금에 와 3년여 전 그 때를 생각해보면 그건 완벽한 쇼핑이었다. 지금은 백구를 닮은 요녀석에게 사랑을 쏟을 때마다 가끔 그 푸들 생각이 난다. 동생이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그 푸들이 왔더라면 지금의 아낌없는 사랑을 그 아이가 독차지했을 텐데. 그 정도로 사랑을 퍼준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일주일 내내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사무실에 앉아 있기가 곤란할 정도로 몸살(목디스크)이 왔었다. 여하간 그 와중에 본가에 갔다가 강아지에게 물려 오른손등에 피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갑자기 화가 났다. 그 다음에 환멸감이 찾아왔다. 왜 나는 너를 이토록 아끼고 너에게 털끝만큼도 상처 하나 안 내려 노력하는데, 왜 너는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생채기를 내는 것이냐, 도대체 왜.
강아지가 상벌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그릇된 훈육방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가 잘못을 저지른 다음날 나는 요 녀석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산책을 시켜줬다. 평일에는 일에 치이는 날이 많아서 주말이 되면 무조건 몇 시간이고 놀아주는 게 내 철칙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주말은 짧다. 이 날은 강아지가 예뻐서라기보다 순전히 반려인으로써 의무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산책을 했다. 그런 나의 불편한 심기도 모르고 요 녀석이 실수를 저질렀다. 불쑥 지나치는 행인을 보며 으르렁대더니 이를 제지하는 내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 것이다. 나는 고함을 질러 개를 앉혀놓고 고정하던 끈으로 강아지 몸통이 흔들릴 만큼 앞뒤로 거칠게 흔들어 가며 내게 바싹 결박시켰다. 눈치가 굉장히 빠른 녀석이라, 평소 같으면 오랫동안 뻗댔을 요 녀석이 원래 내 모습 같지 않았는지 앉으라는 명령에 여우처럼 숨을 고르며 새초롬하게 앉는다. 제발 가끔은 내 말을 좀 먼저 들어, 네 뜻대로만 하지 말고 제발 내 말을 좀 들으라고, 손을 놀리면서 속으로 애타게 말을 건넨다. 내가 움직이는 건 혀가 아닌 허공을 가르는 손과 팔이다. 강아지 어깨에 씌웠던 빨간 고정끈을 더욱 단단히 결박하며 도무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 몰랐던 날, 말(言)을 대신해 나와 이 녀석을 끈끈히 이어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런 생각을 했다.'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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