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쏜살에 매달리다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5. 7. 23:51
# 呈 드릴 정/한도 정
[부수] 口(입 구, 3획) [획수] 총획 7획
1.드리다 2.웃사람에게 바치다 3.나타내다 4.나타나다 5.드러내 보이다 6.뽐내다 7.상쾌하다(爽快-) 8.한도(限度) 9.한정(限定) 10.청원서
# 들뢰즈의 말처럼 사람의 살갗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나에게는 시작과 끝의 경계가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살갗 어딘가 푹 트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끔 생각이 불완전하다. 보이지 않는 빈틈이 있어서 생각이 줄줄 새는 것 같다. 생각이 그 자체로 완결이 돼야 하는데 무언가가 빠져 있다. 어리석다.
# 해를 바라보며 느끼는 시간과 달을 바라보며 느끼는 시간은 좀 다르다. 보통 해는 몸으로 느낀다. 해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날씨가 흐리다거나, 계절이 바뀌는 중이라거나, 5월 치고는 꽤 덥다거나 하는 식이다. 해는 감각을 일깨운다. 반면 달은 이성을 일깨운다. 불과 엊그제까지 초승달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보름달로 꼴이 바뀌어 있다. 체감하는 것과 다르게 벌써 보름이 흘러가 있다. 하루는 자정이 다 된 시간 퇴근길 위 가득 찬 달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달은 참 냉정하게도 경과를 알려주는구나. 친절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구석이 있어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달빛이 들지 않는 현관 그늘로 몸을 숨기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 사람들은 종종 세기말적인 상상에 빠지곤 한다. 또는 형편없는 세상을 향해 자조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나는 역사책을 좋아해서인지 종종 과거에 있었던 천태만상을 흥미롭게 읽는다. 물론 기록으로 간추려진 것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바닥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요새 불평이 늘어가는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시공간이 뒤틀려도 나만큼은 의연하게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단 한 번의 냉정한 순간. 나 자신에게까지 철저히 냉정할 순간.
# 얼마 전 집 베란다에 하늘소가 내려앉았다. 얼마만에 보는 하늘소인지, 몸집이 작아서 얼핏 보아서는 노린재 같았지만 굵직하게 마디진 더듬이가 분명 덜 자란 하늘소였다. 어린 아이처럼 반가운 마음에 ‘하늘소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곤충’이라는 의미까지 덧붙인 건 순식간이었다. 행여 내게 좋은 일을 가져다주려나 기대를 품은 건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 얼마 전 광화문에서 어떤 촬영현장을 지나갔다. 딱 봐도 외관상 (그리고 보조를 맞춰주는 스태프가 여럿 따라붙는 것으로 보아)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남자도 여자도 누구인지는 몰랐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올해 들어 이런 촬영장소를 우연히 지나친 게 벌써 네 번. 도심이라고 하기엔 한산한 평일 오후였고, 커다란 흰 색 촬영차량에 붙은 출력물을 보고서야 좀 전에 촬영하던 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라는 걸 알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문장부호도 의미를 함축한다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뒤에 반드시 눌러써야 한다고 했던 따옴표 세 개는 물론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사소한 마음 씀씀이가 부질없어 보이는 게 요즘 세상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다분히 통속적인 느낌이 있는 소설이라고는 해도, 드라마에 어떤 은유로 쓰였을까 하는 궁금증보다는 쉽사리 영상화된 것은 아닐지 우려되는 마음이 먼저 스쳤다. 워낙 짧은 소설이라서 여러 에피소드로 나눌 거리는 없었을 것이고, 단지 소설 안에 그려진 인물간의 관계도만 차용한 거라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이 전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 드라마를 볼 것 같지 않아 왈가왈부하기도 어렵지만, 모든 것이 한 층 가벼워지는 것 같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 말이 닳고 퇴색되는 건 자연스럽지만 요즈음은 모든 것이 간편하고 쉽기만 한 것 같다.
'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여름, 장마 (0) 2020.07.03 초여름 초심으로 (0) 2020.06.03 克己×克時×克位=? (0) 2020.04.10 말이 아닌 말 (0) 2020.04.09 소모전(消耗戰) (2) 2020.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