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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초심으로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6. 3.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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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봄(春)을 눈으로 본다. 4월이 되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벚꽃축제와 철쭉축제는 눈으로 봄을 만끽하는 기간이다. 우리는 대개 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확실하다고 여기지만 벚꽃이든 철쭉이든 사실 시간의 또 다른 나열(羅列)에 불과하다. 눈앞에 비친 모사(模寫)만으로 봄은 쉬이 해독(解讀)되지 않는다. 5월로 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후각을 거쳐 봄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강렬한 향기가 불쑥 코끝을 간질여 사위를 둘러보면, 반드시 어느 한켠엔가 라일락이 담벼락 너머에서 조용히 자유낙하를 시도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5월이 중순을 넘기면, 이번에는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실려 온다. 언젠가 연구단지네거리까지 진한 향기의 파동을 뻗치던 아카시아 향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처음으로 이 세상의 어떠한 착향(着香)도 날 것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성이산의 도톰한 등마루 위로, 훈풍이 가져온 파문(波紋)에 파르르 나부끼는 은빛 아카시아 군락(群落)을 발견했다. 이윽고 노을에 숨죽인 우듬지만이 속절없이 어슴푸레한 실루엣으로 남는다. 냄새는 흩어졌다가도 모이고 이내 사라지기에 눈에 맺히는 빛이나 상(像)과는 다르다. 나를 아찔하게 만드는 향기 안에서 나의 시간은 방향을 잃는다. 향기는 이처럼 단선적인 시각과 시간 안에 분위기와 입체를 부여한다.
# 키우는 강아지가 장모견(長毛犬)이다보니 본가에 갈 때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기 전에 꼬박꼬박 산책을 시켜준다. 이미 이 녀석에게는 더운 날씨인지 입보다 더 큰 혀를 깃발처럼 펄럭이면서도 사물놀이를 하듯 신명나게 네 발을 놀린다. 그래서 보통은 볕이 뜨거워지기 전 이른 아침에 야산에 데려가 숲길에서 실컷 놀게 하지만, 하루는 해가 완전히 진 늦은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 이런 저녁에는 랜턴을 들고 야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근린공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무언의 룰이 정해져 있다. 초여름답지 않은 낮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원길을 지나고 나면, 약 40분 가량은 다시 인적이 드문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걸어야 한다. 한 유기견을 마주친 건 그 길을 절반 좀 안 되게 걸었을 때였다. 주유소 옆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웬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산책을 시키고 있던 우리 강아지에게 머뭇거리며 관심을 보인다. 아주 가느다란 쇠사슬을 목에 두른 채, 체구는 꼭 우리 강아지만하고 폴짝거리는 게 귀염성이 있다. 그런데 바로 옆은 차들이 쌩쌩거리는 왕복 4차선 도로인지라, 돌봐주는 사람 없이 끊어진 쇠사슬을 덜렁이며 겁없이 쏘다니는 강아지를 보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 뒤로 20미터 즈음 되는 거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는 행인 한 명이 있어서, 행여 이 강아지의 주인일까 싶어 몇 번이나 강아지와 행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성였다. 결국 내 위치까지 다다른 행인은 주인이 아니었음이 판명되었고, 그새 천진한 얼굴의 강아지는 수풀 사이의 그늘진 배수로로 쏙 몸을 숨겼다. 어떤 판단을 내렸어야 올바른 것이었나 생각이 들었던 건 산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였다. 내가 신고를 해서 기관에서 유기견을 구출해도 일정기간이 지나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되리라는 상상과 함께, 비위생적으로 아무데나 방치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은 바쁘다는 핑계로 금세 까먹었다. 무겁든 사소하든 결정은 결정인데 오늘의 사회에서는 결정이 필요한 것이 수없이 예기치도 않게 찾아와, 결정을 미룬 것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무의식 안에 쌓이고 쌓여 나를 짓누르기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결단을 조장하는 모든 종류의 광고를 싫어한다) 고의인지 단순한 실수인지 강아지를 길에 두겠다는 주인의 자기중심적인 결정은 결국 뜻하지도 않은 장소와 시각에 내가 분담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매사가 이런 모양이다. 책임과 의무, 인과(因果)의 연결고리는 촘촘해졌는데도 그 전개양상은 더욱 예측할 수가 없다. 그리고 허술한 망(網)을 틈타 편승하는 이로 인해 갈팡질팡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의 몫이다.# 지하철에 앉은 두 연인이 두 손을 나란히 깍지 낀 채 각자의 스마트폰에 골몰(汨沒)해 있다.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화가 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다가 대화가 오가기는 하는데,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상대에게 보여주며 의견을 나누는 정도다. 그러한 대화의 와중에도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그냥 혼자서 느낀 것을 상대에게 겨우 들릴 만큼 혼잣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인류는 물리적 영역을 개척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침내 그 자신을 스마트폰이라는 작고 가벼운 철조물 안에 가두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에 대해 확신을 잃어간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줌만한 크기의 세상이었는데, 무엇하러 온 정력을 쏟아 앎의 영역을 넓히려 해왔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한 손에 착 감기는 이 신철기(新鐵器)를 스마트폰(Smartphone)이라 부르는 대신 스포일링폰(Spoilingphone)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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