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은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 좋은 죽음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눈다면 어떨까? 행복한 일상, 삶에서 우선순위를 세우는 방법, 자신을 챙기는 방법, 이기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삶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여러 자기계발서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삶(Eudaimonia)’이라는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부터 철학에서도 이미 오래된 화두였으니까.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죽음을 다룬 철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로 떠오르는 건 내게는 쇼펜하우어와 뒤르켐 정도다. 내세에서의 구원을 약속하는 성경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가까운 현세에 관한 것들이다. 안락사 문제를 다룰 때도 허용된 살인행위냐 인간의 존엄성 문제냐가 첨예한 논점이 된다.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스스로 삶을 부정(自殺)하는 자와 홀로 죽음을 맞이(孤獨死)하는 자가 우리 사회에 늘고 있는 게 문제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삶의 도피처? 하나의 거대한 심연(深淵)? 순수악(純粹惡)?
5년여 전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행복감을 인생의 효용으로 놓고 대단히 논리적인 방식으로 죽음의 무게를 저울질한다. 경제학 책보다도 더욱 무미건조하게 죽음을 해부하면서도 질서정연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안나 카레니나>처럼 주인공의 자결로 끝을 맺는 소설은 적지 않지만, 자결하는 대목에 이르기 전까지 절대다수의 문학은 삶에 천착해 있다. 우리에게는 좀 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망자(亡者)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게 미덕이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죽음의 의미가 여러 방향―대개는 폄훼되거나 과다한 의미로 윤색(潤色)된다―으로 대중없이 뻗어나간다. 그렇게 죽음마저도 열심히 소비된다. 하지만 방향은 먼저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점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설정할 수 있는 법이다.
미디어라는 웜홀(wormhole)은 우리를 흡입해 영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컨택트>처럼. 우리는 편집된 화면과 자막을 통해 뉴스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건―그것이 삶에 관한 것이든 죽음에 관한 것이든―의 본뜻, 본질, 핵심에 가까워졌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텍스트를 압도하는 이미지들 안에서는 점점 더 표상(表象)이 중요해지고 몇 가지 기호(記號)가 힘을 발휘한다. 단단히 고정된 텍스트 안에서는 행간의 의미를 추론했지만, 쉴새 없이 전환되는 이미지 안에서는 부유물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어디가 삶의 여기이고 어디가 삶의 저기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이 아무런 여과(濾過)없이 세상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살갗, 각막, 혀의 돌기부터가 환경을 받아들이고 투과하는 기관이자 가냘픈 셀로판지이다.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텍스트와 이미지 안에서 우리는 삶의 순방향과 죽음의 역방향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어떻게 하면 생과 사에 대해 균형 잡힌 얘기를 할 수 있을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