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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끝자락의 기록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8. 21. 00:05
# 8월 길고 긴 장마가 끝나기 전의 일이다. 잠깐 볼 일이 있어 고등학교에 갔다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10년 넘게 흘렀는데 정말로 신기할 만큼 예전 모습 그대로셨고, 정작 나를 보고 이름을 못 떠올리시면서도 소녀처럼 엄청 반가워하셨다. 나를 보면서 예전 모습 그대로라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달라져봐야 얼마나 달라졌겠나, 연세가 있는 선생님이야말로 그대로인 게 더 놀랍다는 생각. 졸업앨범을 열어보며 한 시간 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종 연락도 드릴 겸 휴대전화 번호도 교환했다. 반갑다는 인삿말로 집에 돌아와 메시지를 남겼는데, 뒤이어 선생님에게 긴 메시지 하나가 왔다. 내가 기억하는 너는 아주 착하고 성실한 아이이고……
착하고 성실한 게 미덕이 아닌 요즘 세상에 이런 문구를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다자키 쓰쿠루라는 인물이 순례를 다니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아주 오래 전 과거를 추적하는 일본인이 북유럽에 가서 타인이 바라본 자신을 확인하는 이야기. 주인공은 무미건조하다고 느꼈던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여하간 내가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성실한 거야 그렇다 해도, 착한 아이였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누구나 그런 만큼 나 또한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스마트하고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아이 따위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든 10년도 더 된 내 옛 모습에 대한 평을 들으니 묘했다. ……근데 착하게 살면 내가 너무 힘들더라구. 장문의 메시지 속에 뒤따라온 선생님의 진의(眞意)와 함께, 내가 정말 착하고 성실했는지와 무관하게 그런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 마찬가지로 장마중의 일이다. 친구가 코칭하는 곳에 가서 코칭을 받았다. 버크만 진단을 수행하고서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윤곽을 잡는 소모임 같은 자리였다. 버크만 진단은 MBTI와 비슷한 검사인데 자신의 흥미와 적성, 성격 뿐 아니라 사회화된 행동과 스트레스 행동에 대한 분석이 덧붙여져서 분석이 더 입체적이다. HR업무를 하기는 했었지만 HRD 쪽은 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데, 요새는 관리자급들을 대상으로 코칭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렇기는 해도 코칭에 대한 인식이 아직 보편적이지는 않아서 업무에 활용되는 경우가 드문데, 감이나 촉으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이런 진단을 이용해 체계적으로 업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크만 진단에서는 본인이 과업을 수행할 때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운지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운지에 대한 부분도 다뤄지는데, 특히 이 부분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과업을 해결하는 접근 방식이 아주 쉽게 바뀐다는 분석에 뜨끔. 친구가 코칭 받으러 오라고 할 때마다 나는 필요없다고 누누이 거절했었는데, 재미도 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 몸과 마음이 많이 무너졌던 것 같다. 우선 몸부터 추스리고 기운을 차려야지. 감상적이지 않을 것!'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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