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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Nazi)와, 춤추는 나비일상/film 2020. 2. 24. 00:51
Schau nicht weg.
최근 보기 드물게 여러 편의 독일 영화가 개봉했다. 그 중 한 편('1917')은 1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고 나머지 두 편('조조 래빗'과 '작가 미상')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룬다. 세 편 모두 아카데미 시상식—맞다, 봉준호 감독에게 영예를 안겨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에 노미네이트되었는데, 이 중 두 편('1917'과 '조조 래빗')은 영어로 된 영화이고, 다른 한 편('작가 미상')은 온전히 독일어로 되어 있다. '1917'은 마찬가지로 독일이 일으킨 전쟁을 다루기는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영국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조조 래빗'과 '작가 미상'은 독일이 일으킨 전쟁 속에서 독일인들이 느꼈던 양가적인 감정을 다루고, 또한 전쟁의 야만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2차 세계대전을 공통적인 소재로 삼는다. 근래 700페이지가 넘는 <독일 현대사>를 열독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조조 래빗'과 '작가 미상'만큼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먼저 '작가 미상'을 찾아보았다.
영화는 나치 시대를 축으로 3세대에 걸친 어느 독일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담아야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인지 가끔 엉성하게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열린 결말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영화의 엔딩은 다소 갑작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그 시대(Nazi era)'를 살아갔던 독일인들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방어기제)와 생활양식들을 아주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픽션으로 소개하면서, 또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라는 실존 화가의 스토리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얽혀 더 이상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인물들의 관계도 속에서 전후 독일인들이 당면한 전쟁에 대한 죄의식과 이를 대하는 복잡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사실 포스팅을 남기는 이 시점이 되어서는 <독일 현대사>라는 두꺼운 책을 막 덮은 참이기 때문에, 영화가 그리고자 한 전체적인 상(像)이 좀 더 선명하게 읽힌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꼬마 소년 쿠르트는 오이겐 호프만(Eugen Hoffmann)의 <파란 머리의 소녀>라는 조각에 매료된다. 오이겐 호프만이라 하면 동독에서 활동한 화가로 <독일 현대사> 책에 소개되는 바에 따르면 사통당에 당원으로서 적을 두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지 않고 분방한 예술활동을 전개한 탓에 동독 정부로부터 퇴폐 예술가로 낙인 찍힌 인물이다. 그런 호프만의 작품에 사로잡힌 꼬마와 꼬마를 대동한 이모 엘리자베스는 사상을 통제하는 동독 사회라는 틀에 걸맞지 않는 인물들임을 암시한다. 예고된 대로 엘리자베스는 이른바 '아리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조현병 증상을 나타내게 되었을 때, 건강한 아리아인 순혈을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히틀러의 순혈주의 정책에 따라 불임수술에 처해지고, 이마저도 모자라 다른 장애인 그리고 유대인들과 뒤섞여 수용소에서 화학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마도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Antonius van Verten) 교수가 자신의 예술 인생을 쿠르트에게 얘기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이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 실화에 기반한 인물인지 아닌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형편 없는 소년 무전병이었던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 그의 추상화에 지방(fat)과 펠트라는 소재를 끌어왔는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안토니우스와 쿠르트의 도제관계가 이렇게까지 발전했었나 싶은, 조금은 급작스러운 진전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안토니우스의 옛이야기는 예술에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으라는 진정어린 충고를 담고 있고, 이는 쿠르트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현대 추상미술의 실험장이라고까지 묘사되는 뒤셀도르프라는 공간 안에서 쿠르트는 일체의 정치색을 배제한 채—안토니우스는 극단적으로 자민당이든 사민당이든 기민련/기사련이든 다 집어치우라며 당포스터를 태워버리기까지 한다—어떤 예술세계를 쌓아올릴 것인가?
어느 정도 추상성을 덧대기는 하지만, 흑백사진과 사실주의적 기법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쿠르트가 다다른 종착역은 상당히 의외였고, 영화를 보면서도 내게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쿠르트의 모델이 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들을 직접 구글링해보았다. 초창기의 작품들은 영화에 묘사된 대로 흑백의 이미지를 좌우로 흐릿하게 블러링한 이미지들이고, 이것들이 점점 더 추상적인 형태로—때로는 모자이크에 가까운 형태로—발달해 간다. 전후 독일의 정치는 탈나치화를 큰 축으로 삼았고, 이러한 정치는 종종 '기억의 정치'라는 말로 빗대어지기도 했는데,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쿠르트가 그린 그림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독일인들의 곤란한 처지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 현대사>라는 책에 보면 나치 정권하에서 나치당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독일인이 대다수였을지는 몰라도, 모든 독일인은 나치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오염되었다. 때문에 전후 처리 과정에서 전범을 처단하는 일은 어디까지를 나치로 보고 어디까지를 게슈타포 활동으로 보느냐에 대한 지난한 논쟁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은 90년도 통일을 맞이하면서 이중고를 겪게 된다. 이번에는 동독의 공산당 아래에서 슈타지 활동을 했던 인물들을 스크리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게슈타포에 비견될 만큼 조용하면서도 악질적이었던 슈타지의 활동에 연루되지 않은 동독인들은—나중에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던 동독 출신의 정치인들조차도—없었고, 이른바 정의를 회복해 나가는 여정에서 이들은 과거의 덫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독일사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반트 교수와 같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위장하여 독일사회에 여전히 기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까지도 뉴스에 어느 나치 협조자가 마침내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거꾸로 생각하면 나치라는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해결의지가 여전히 확고함을 독일시민과 정부가 의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덧1. 폭격 이전의 드레스덴의 시가지가 프라하 못지 않게 아름답게 그려진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덧2. 동독에서 소비에트의 입김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영화였다)
조조 래빗!!! 아무리 그래도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가 이렇게 귀엽고 앙증맞게—심지어 히틀러까지 깜찍(?)하게 나오다니......=_=—나와도 되는거냐~ 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보면 볼 수록 <작가 미상>과는 다른 시점에서 '그 시대'를 살아간 독일인들의 감성을 잘 나타낸 영화였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치 시대의 흑백영상이 편집되어 나열되는데, 그야말로 광기의 도가니에 휩싸인 군중이 히틀러를 향해 하일! 히틀러!!!!!!!! 외치는 모습은...가히 충격적이었다. <작가 미상>에도 배우들이 이런 군중 연기를 하는 장면이 나올 때 뜨악 했었는데, 알고보면 이 장면은 당시의 열기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었다... 실제 흑백영상 속 게르만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치 비틀즈 100개 군단이 동원되기라도 한 것처럼 하일, 히틀러를 외치다 집단 실신할 분위기다;; 소름 돋았다.
<작가 미상>이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억압 아래에서 불요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성인(쿠르트)과 고민없이 순응하고 타협하는 반대편의 성인(제반트)을 대조하여 보여준다면, <조조 래빗>은 어린이의 시각에서 때묻지 않은 시선으로 나치를 바라본다. 어린 조조에게 나치와 히틀러는 말 그대로 아이돌이다. 과격하게 말해, 조조는 그저 팬덤문화를 잘 가꾸고 나치에게 먹칠을 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열성적인 팬일 뿐이다. 조조에게 유대인은 머리에 뿔을 갖고 있고, 비위생적인 할례를 전통으로 삼으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자고, 길다란 꼬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짝이는 금속덩어리(돈)를 밝히는 못된 족속들이다. 레지스탕스인 로지는 그런 아들에게 사실은 사랑이 철보다 강하다며 타이르지만, 동심 속에 이미 똬리를 단단히 틀어버린 나치에 대한 비판이 행여 아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차분하게 지켜보며 기다린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게 사랑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나중에 그 감정을 자연히 깨닫게 될 때 뱃속에 나비가 든 기분일 거라고 말한다.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
-Rainer Maria Rilke
코믹적인 요소가 가득하고, 때로 독일이 연합군의 공중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로맨틱하게 그려지지만—영화의 후반부에서 조조와 엘사는 멀리서 간헐적으로 번뜩이는 섬광을 넋놓고 바라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영화가 다루는 나치의 비윤리성과 전체주의적 비이성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나치가 동원한 근거없는 유대인 박멸 정책(홀로코스트)과 게르만족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논리가 밑천을 드러내면서, 나치의 행보는 보다 야만적이고 보다 폭력적으로 급속히 변이해 간다. 달콤한 말들로 속삭이던 조조의 머릿속 히틀러는 이윽고 완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유니콘 고기—뿔이 달린 유대인에 비유—를 썰어먹는 장면은 히틀러가 최종적으로 자가당착한 유아적 세계를 코믹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어린 조조가 편견을 극복해나가는 성장일지이기도 하다. 로지의 도움으로 독일인의 집안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유대인 출신의 엘사, 그리고 그런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조조는 마침내 나비를 발견한다. 물론 조조는 그 푸른 나비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소리 소문 없이 공개 처형 당한 레지스탕스(로지)를 힘없이 바라보고 흐느껴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항(레지스탕스)을 해야 하는 시대란 말인가? 비합리와 광기의 토대위에서 쌓아 올린 유대인 혐오라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을 무너뜨리기 위해, 덧없는 목숨들이 대가를 치러야만 했으니.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 문턱에 서서 엘사를 마주보고 어깨춤을 추는 조조는 어느덧 어른의 문턱에 발을 들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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