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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to Gehenna, or up to the Throne,
He travels the fastest who travels alone.
―Ruyard Kipling
롱테이크―하나의 숏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를 눈여겨봐야 하는 영화라 하더니 과연 롱테이크를 최대한 활용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이와 더불어 1917년도의 생활상(전투복장, 전술, 건물, 소품 등등)을 최대한 고증한 모습이 엿보이는 부분 역시 좋았다. 롱테이크 촬영을 하기 위해 제작진이 세심하게 공들인 것들이 놀라울 정도이기는 했지만, 기법 특성상 몰입이 길어지다보니 사실 장면에 따라 조금 피로한 느낌도 있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에쿠스트(Ecoust) 마을에서의 장면이다. (역설적이게도) 황홀하게 불길에 휩싸인 마을 한가운데서 주인공 스코필드는 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건물의 지하공간으로 잽싸게 몸을 숨기는데 알고보니 그가 들어간 곳은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가정집이었다. 어떤 프랑스 여인과 토막토막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 뒤, 남자(스코필드)는 담요에 싸인 채 구석에 놓여 있던 아이를 들어올린다. 스코필드가 아이를 향해 영국 민요 같은 걸 흥얼거리는데 아이가 고사리 손을 어설프게 뻗으며 옹알이를 한다. 동틀녁이 되자 전령(傳令)을 전달해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를 깨달은 남자는 다시 길을 나선다. 전쟁의 참화를 뚫고 이어지는 일상의 흐름과 망각하고 있던 전쟁의 위중함이 잘 적절히 묘사되어서 마음에 와닿았던 장면이다.
또한 아무래도 참호(僭號)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마지노선(Maginot Line)이라는 게 실제로는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현실감 있게 연출되었다. 재래식 전투의 느낌이 물씬 나면서도, 전쟁에 긴박하게 동원되는 노동력과 간헐적인 폭격소리에 길들여진 병사들의 자조 섞인 행동과 말투까지 잘 묘사되었다. 저 쓸모없는 땅뙈기를 얻겠다고 수년 동안 싸웠다며 진저리를 내는 어느 영국병사의 푸념은 ‘무익(無益)함’을 사이에 두고 생존을 다투는 전쟁의 비합리성과 광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
여러모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과 각축을 벌였다는 게 이해가 가는 영화였다. 함께 전장(戰場)으로 뛰어든 두 병사의 전우애도 선명한 인상을 남겼고, 공중전을 펼치는 전투기를 보며 경기를 관람하듯 어느 편이 우위에 있는지 무심하게 가늠하는 장면에서는 일상화된 전쟁이라는 게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선의(善意)가 항상 상대방의 선의로 되돌아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고... 전쟁이라고 해봐야 군대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우리가 비정상이라 여기는 전쟁은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고, 우리가 정상으로 생각하는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이 어쩌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예외적인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니 묘한 기분이 든다.
+덧붙임: 일부 해외 비평을 찾아보니 (영화가 실화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당시의 전투기록과 비교했을 때 스코필드라는 인물이 전령을 전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얼마만큼 인명피해를 줄였는지 의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한 군인의 이야기를 현미경처럼 포착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의 큰 상(像)을 놓쳤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자랑거리로 훈장을 간직하고 싶지도 않다는 스코필드의 말이야말로 전쟁의 핵심을 찌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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