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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스탠리 큐브릭일상/film 2020. 3. 17. 17:52
1월경에 홈씨어터를 만들어보겠다고 빔프로젝터를 구매했었다. 빔프로젝터도 다른 전자기기들처럼 사양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HD 화질을 구현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조건만 두고서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 중에 하나를 골랐다. 물건이 집으로 배송온 뒤 며칠 동안은 뜯어보지도 않고, 빔스크린으로 쓸 커다란 천―너무 새하얀 스크린보다 따듯한 천의 색감이 좋았다―을 하나 구하고, 빔프로젝터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지지대를 구했다. 천장에 천을 고정해줄 수 있는 걸개를 준비하고, 노트북과 빔프로젝터를 연결해주는 HDMI 케이블까지 준비하고 나니―노트북의 OS가 무선으로 호환되지 않았다;;―영화를 틀 수 있는 대강의 외관은 갖췄다.
어느 정도 외양을 갖추고 나서도 영화를 볼 생각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코로나로 인해 영화관을 가기도 어렵고 결정적으로 영화관 자체에서 상영시간대 자체를 줄이다보니 선택권이 확 좁아졌다. 그렇게 해서 말로만 듣던 넷플릭스 무료 체험을 신청하고 처음으로 봤던 게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그냥 전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정말 1968년도 작품이라고?! 하면서 봤는데, 1968년도에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검색해보니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해라고... 여하간 이게 68년도 작품이라는 것에 놀랐던 까닭은, 연출기법이 특출나거나 이야기의 구성이 기발해서라기보다 우주 공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컨택트>,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마스>, <퍼스트맨> 등등 재밌지 않은 우주영화야 없겠지만, 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지금 개봉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크게 어렵지는 않다. 크게 세 개의 연결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초기 인류, 달 탐사, 목성 탐사 순서로 구성된다. 사실상 서로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건 정체불명의 시커먼 인공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되는 장면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가장 난해한데, 시커먼 인공물로 진입한 우주선이 끝에 다다른 곳은 미지의 방이다. 종착지에 다다른 데이브의 얼굴은 초췌한 대신 순식간에 세월을 돌파한 사람처럼 노쇠해 있다.
방과 이어진 몇몇 공간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 그리고 식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서로의 존재를 상호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향으로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 두 명이 서로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한 명이고 다른 한 명은 다른 존재의 인기척을 느끼지만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면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알쏭달쏭한 장면인 데다가 그리 길지 않은 압축적인 장면이어서 궁금증이 생기는 대목이다. 뜻을 덧붙여보자면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난관에 부딪치는 건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행성처럼 동그란 태반(胎盤) 안에 자리를 틀고 있는 태아가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天地創造)>처럼 지구를 향해 마주한다. 유인원들이 도구를 발견하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되돌아가는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인류의 진보는 단선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는 얘기인 것인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키는 검정 인공물이 세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貫通)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구-달-목성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이동과 진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목성 탐사선을 진두지휘하는 HAL이라는 인공지능은 우리가 기술적 진보라고 부르는 것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관련해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이 부분 역시 1968년도에 예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특히 마지막 목성 에피소드에서는 진보라는 것이 과연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이뤄내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마저 품게 만든다. 지금만 해도 컴퓨터나 휴대폰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앞으로 인공지능이 보급된다면 인간의 의지와 사고(思考)마저도 기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추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이런 영화―날 것을 그대로 그린 듯하면서 철학적인 생각이 담긴 영화, 게다가 시각적인 연출까지 뛰어나다면 더더욱!!―를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영화의 뜻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특히 ‘오렌지’라는 단어 때문에 헷갈리는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해석을 하는 방식이 분분하기는 해도, 공통된 의견은 ‘기계처럼 작동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알렉스 역을 맡은 말콤 맥도웰의 연기가 대단한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주었던 잭 니콜슨을 보는 듯했다. 청소년기에 있는 네 명의 학생 무리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알렉스는 유아기에 있는 갓난아기처럼 항상 유리잔에 우유를 마신다. 때문에 이들 무리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광기, 일탈은 이미 유아기부터 내재된 모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사회는 끊임없이 이를 옥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지적했던 것처럼 사회는 끊임없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입하고 이분법적인 구조 안에 구성원을 가둔다. 이 영화에서 사회를 이등분하는 내용물은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이다. 이를 둘로 가르는 심판관들―교정시설이나 교도관, 경찰―역시 선과 악을 재단(裁斷)할 능력이 없는 인물들임이 드러나지만, 오이디푸스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회 구조 안에서 여하간에 채찍질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러한 공간 안에서 죄수 알렉스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수감번호로 불림으로써 몰개성화된다.
인간의 선량함을 강조하는 사회의 패러독스는, 정작 알렉스가 교화(敎化)되어 감옥을 나섰을 때 아무도 그를 선한 존재로 받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방식을 통해 알렉스는 선한 존재로 말끔히 거듭났지만 사람들은 그를 반기지 않고 심지어 앙갚음을 한다. 그만큼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주홍글씨라는 것이 이토록 강력한데, 어릴 적 함께 비행(非行)을 일삼던 무리들이 이제는 경찰관이 되어 알렉스에게 고문을 가하는 장면에서, 선행에 앞장서야 할 이들이 악행을 통해 선한 이(알렉스)에게 고통을 가하는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선(善)을 가까이 하고 악(惡)을 멀리하겠다는 사회적 의지가 실제로 어떤 양상으로 펼쳐지는지 확인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눈여겨보았던 것은 알렉스가 루도비코 프로그램을 통해 악한 본능을 제거하여 선량한 시민으로 개조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치료 프로그램이 물리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와는 별개로, 윤리적인 측면에서 심각한 질문을 두 가지 제기하게 된다.
먼저 의료진이 정의한 선과 악의 구분은 대단히 자의적(恣意的)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치적 동기에 의해 조작되기도 한다. 의료진이 정의한 악은 크게 폭력과 성(性)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어떤 속성이 악한지에 대하여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기 때문에 선과 악을 양극단에 두고 펼쳐지는 여러 윤리적 스펙트럼을 완전히 놓치고 만다. 예를 들어 ‘성’ 자체가 규탄해야 할 대상이라 한다면, 성과 관련된 모든 논의―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든가 성적 소수자라든가―가 자동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지적한 오이디푸스 구조가 외삽된 사례다.
또 한 가지, 알렉스의 선량함을 증명해 보이는 자리에서 인간의 도덕 의지를 통제하겠다는 과학자들의 야심은 비판에 직면한다. 알렉스는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저항하기는커녕 굴욕적으로 발길질하는 구두의 밑창을 핥는다. 알렉스의 뇌에서 폭력성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전라(全裸)의 여성이 유혹을 하지만 전혀 반응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반응이 좌절된다. 성적 반응을 느낄 수 없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두고 교도소의 목사는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지, 단지 필요악이라는 까닭에서 도덕 의지를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항변한다.
사실 과학자들이 바라던 대로 모든 사람들이 선해진다고 해서 우리 사회까지 선해질까? 과학자들이 꿈꾸는 공동선에 다다르더라도, 그것인 개인의 자유의지나 윤리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단지 결과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공동선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그러한 공동선의 규정마저도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소수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선을 말하는 자들이 사실은 꽤나 결함 있는 인간들이라면?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면서 잭 니콜슨의 광적인 연기를 떠올렸는데, 바로 <샤이닝>을 보면서 잭 니콜슨을 만날 수 있었으니… 과연 잭 니콜슨의 연기는 볼 만하다'~' 연달아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을 보면서 놀랐던 점은, 세 영화 모두 장르가 다르다는 점이다. 첫 번째 영화는 공상과학 영화(이면서 인류의 진보를 다루는 영화)였고, 두 번째 영화는 청소년 드라마(이면서 사회적인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였고, 끝으로 <샤이닝>은 스릴러물(이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 영화)였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다채로운 자극을 제공한다든가 짜릿한 전율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는 사람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암시가 잔뜩 깔려 있다+_+
어떤 면에서는 세 편의 영화 가운데 숨은 뜻을 파악하기가 가장 까다롭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묘미가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왔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로(Maze)에 잘못 발을 들인 기분이랄까.
영화에서 호텔의 지배인은 새로 고용된 관리인에게 의미심장한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으스스한 얘기를 듣고 잭은 전혀 개의치 않지만, 잭은 점점 더 그 이야기 속 잔인한 주인공으로 변해간다. 지배인이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잭이 그 이야기와 밀접한 경험을 겪을 거라는 걸 관객 누구나 뻔히 예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 예상가능했던 내용은 입체적인 자취를 남기며 흥미진진하게 플롯을 이어나간다. 가령 밀실처럼 고립된 오버룩 호텔―‘간과하다’ 또는 ‘내려다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overlook’이라는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 가까이에 무기를 둔다. 누가 살인을 저지를지, 언제 살인을 저지를지, 누가 살인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두에 아주 분명하게 앞으로 진행될 시나리오가 언급되었음에도 보는 이는 오히려 긴장을 멈출 수 없다.
영화에 심어놓은 여러 메타포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첫째, 공포라는 것은 때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은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공포의 과잉은 불요(不要)하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행동을 조장한다. 공포의 감정이 불어나는 것은 환경의 영향도 크지만, 개인이 주변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몇 안 되는 등장인물들은, 몇몇 정황과 미심쩍은 이미지들에 근거해 ‘공포’라는 틀을 빈틈없이 짠 후에, 그 안에 자신의 불안감을 투사한 불확실한 풍경을 스케치해 나간다.
다른 한 가지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무엇이 진실이냐’하는 부분이다. ‘뫼비우스 띠’ 같다고 했던 건,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이야기가 되면서 반투명한 플롯들이 겹을 이루며 영화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셀로판지를 무질서하게 펼쳐 놓았을 때 확인할 수 있는 건, 어떠한 사실의 모양이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그러한 사실을 확정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옹하고 있던 나체의 여성이 어느 순간 곰팡이 핀 역겨운 존재로 변해 있다든가, Redrum의 의미가 도치된다든가; murder하는 부분들)
때문에 영화에서 초현실적인 능력으로 소개되는 ‘샤이닝’이라는 것도 사실을 바라보는 한 관점 또는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샤이닝을 하는 인물들이 읽어내는 맥락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짐작, 추측, 견해, 때로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샤이닝>이라는 영화는 결국 잭이라는 한 명의 괴팍한 남성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동시에, 사실을 어떻게 비추는가(shine; shed light on)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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