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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프랑수아 오종일상/film 2020. 4. 2. 22:23
틈나는 대로 영화관을 가던 게 어려워지면서 요즈음 이런저런 자구책을 찾아보게 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영화관을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들었어도 관객이 없어 스크린에 내걸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정말 큰 문제인 것 같다. 하여간 집에서라도 영화를 보겠다고 맨 처음 시도했던 게 넷플릭스인데, 드라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화가 너무 빈약하다. 덕분에(?) 이름만 접해보고 본 적은 없던 클래식 영화들―미국 명작들은 얼추 다 갖추고 있는 것 같다―이라도 찾아보고는 있지만 이걸로 충분치는 않다.
그나마 애플TV가 다국적에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 애플TV가 우리나라에 언제 서비스를 론칭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별도의 플랫폼 없이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영화 하나를 볼 때마다 렌탈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여전히 합리적인 가격이기는 하지만, 많은 영화들―특히 비할리우드 영화로 갈수록―이 한국어 자막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외국어 공부 겸 영어 자막을 틀어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선뜻 결제하기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다가 흘러흘러 발견한 것이 네이버 영화. 렌탈료는 애플TV의 3분의 1 수준이고 (심지어 기기에 다운로드도 가능함) 애플TV만큼 영화가 다양하고 한국어 자막까지 아주 괜찮은 걸? 했는데 문제점은, 첫째, PC의 경우 윈도우 환경에서만 미러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래서 맥OS를 쓰는 나는 홈시어터로 시청할 수가 없고), 둘째―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기는 한데, R등급 영화에다 덕지덕지 블러 처리를 해놓았다=_= 어떤 화면을 블러 처리하는 건지 도대체 그 기준이 뭔지 궁금한 문제를 떠나서, 화면에 뜬금없이 블러 처리된 이미지가 뜨면 아주 거슬린다. 애당초 영화는 영상물인데 임의로 스프레이 처리를 해놓다니 이게 감독의 의도마저 훼손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하간 그렇게 어렵사리 본 영화가 프랑수아 오종의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다. 이 영화는 광화문에 스폰지하우스가 있던 때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넷플릭스랑 애플TV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던 걸 네이버 영화에서 찾았다. 로망 뒤리스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인데, 프랑스 영화에서 굵은 선의 연기를 보여왔던 로망 뒤리스가, 여성의상 도착자로 나오는 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제목을 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로 번안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치정(癡情)의 느낌을 은근히 내비치면서 관객을 끌어모을 생각이었던 걸까. 원제가 <Ma nouvelle amie>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또는 ‘다른 종류의’라는 맥락에서 ‘nouvelle’이었다. ‘사적인’을 뜻하는 ‘privé’, ‘personel’, ‘individuel’ 등은 없다. 심지어 내용도 ‘사적인’ 건 완전히 부차적이어서 황당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친구’가 ‘이성교제 중인 여성 상대방’을 뜻하지만 프랑스어 ‘Amie’는 ‘여성인 친구(여자사람친구)’까지 통칭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의 ‘버지니아(Virginia)’라는 인물은 극중에서 후자의 뉘앙스에 훨씬 가깝기 때문에 여러모로 한국어 제목에 아쉬움이 남는다.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은 약간의 얄팍함(superficial)이 매력이다. 이 작품 이후 만들어진 <두 개의 사랑>과 같은 느낌이 다분히 드는 작품이었다. 클레어의 감정선은 차치하고, ‘다비드’이자 ‘버지니아’인 중심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 나의 핵심질문이었다. 지킬 앤 하이드=다비드 앤 버지니아라 도식화하면 무리일까. ‘다비드’야 로라의 남편이자 루시의 아빠라 하고, ‘버지니아’는 누구인가? 여성의상에 미친 사람, 이성애자, 동성애자, 여자이고 싶은 남자, 로라를 그리워하는 남편? 한편 상대항(恒)에 있는 클레어는 ‘버지니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로라의 대리인, 친구, 사랑하는 여자, 사랑하는 남자? 영화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솔직히 이 중 어느 관계에 해당하는지 결론을 못내겠다.
다만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었든 간에 배가 부른 클레어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이들의 관계가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 불완전하고 심지어 비정상적인 것이라도) 결실을 맺었다는 것, 무언가 잉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극중에서 그 모습을 끊임없이 탈바꿈하는데, 엠마뉘엘 레비나스가 ‘현재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존재는 존재(être)일 뿐이지, 존재자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버지니아가 클레어에게 일갈한 것처럼 자신이 여장(女裝)한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부터 호감을 느낀 것 아니냐고 따질 필요도, 클레어가 야멸차게 대꾸한 것처럼 로라가 사라지면서부터였겠지! 하고 뒤돌아 설 필요도 없다. 이들의 관계는 그 자체로 현재다. 현재는 완전히 열려 있기도 하지만 완전히 닫혀 있기도 하다. 완벽한 익명성(匿名性). 그 안, 그 안으로 향하면서 벗어난다.
이 영화는 애플TV(인지 아이튠즈 스토언지도 이제 헷갈린다)에서 $3.99를 주고 봤다. 언어가 프랑스어라는 것 외에 자막 정보가 나와 있지 않아서 쌩으로 프랑스어만 나오면 어쩌나 하고 결제까지 꽤 망설였다. 다행히 영어 자막이라도 있어서 영화의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프랑스어랑 영어 공부가 동시에 되는 느낌이 있었다. 영어 공부도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Pompous, hick, prance 같은 표현들은 사전을 검색해가면서 봤다.
외출 없이 영화를 보려다 보니 영화를 감상하는 색다른 다른 방법(?)이 생겼는데, 그냥 한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을 무턱대고 파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한 감독의 작품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건 확실히 장점이다. 때문에 전날까지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를 보며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에서 약간의 얄팍함을 느꼈던 건 재고할 필요가 있겠다*-* <인 더 하우스(Dans la maison)>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보다는 시간상으로 더 전에 제작되었지만, 보다 재치 있고 더욱 독특하다. 그러면서도 프랑수아 오종의 다른 작품들―<두 개의 사랑>―과도 결을 같이 한다. 욕망,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문학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에서 출발하는 듯한 영화의 플롯은 사실은 하나의 쌍(雙)을 그린다. (그의 또 다른 영화 <두 개의 사랑>과 아주 비슷한 기법이다.) 제르망(Germain)의 제자 끌로드(Claude)가 쓰는 글은 하나의 ‘거울’이다. ‘이어서(À suivre)’라는 (생각해보면 기발한) 단서를 달아가면서 연작을 쓰는 행위는, 얼룩이 낀 거울을 공들여 닦는 과정이다. 자신을 좀 더 투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정확히 투사하기 위해서. 가장 눈에 띄는 한 쌍이라고 하면, 잔느(Jeanne)의 신경을 계속 긁는 예술가 쌍둥이 자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개의 삶이지 않을까.
요컨대 라파(Raphaél)의 삶과 제르망의 삶은 아주 닮아 있다. 라파의 집에서 어머니 에스더(Ésthere)의 모습이나 제르망의 집에서 아내 잔느나 대개 비슷한 느낌으로 그려진다. 이들은 불임(stérile)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임은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불임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꿈꾸기만 하고 일구지 ‘못한다.’ 그저 그런 삶(la classe moyenne; 물론 기본적으로 중산층 또는 서민이라는 뜻이지만)이다. 그들의 배우자들이라고 딱히 다르지는 않다. 잔느의 남편 제르망이나 에스더의 남편 큰 라파나, 삶이라는 문을 맥없이 콩콩 두드려보기는 하지만 그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문학 교사 제르망은 끌로드라는 재능있는 학생을 매개(媒介)로 라파의 집에 개입하려 한다. (아주 발칙한 발상이다^a^) 마치 작가의 글쓰기를 독려하는 출판업자처럼 제르망은 끌로드에게 라파의 캐릭터를 더욱 선명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릴 것을 종용하지만, 그의 극성스러움이 단지 교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끌로드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싶기 때문인지는 모호하다. 사실 제르망이 끌로드의 글쓰기를 고쳐주는 과정에서, 끌로드나 라파의 집에 단지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제르망 그야말로 진정 감화되는 존재다. 제르망은 형태를 더해가는 글 안에서 점점 더 굴종적으로 끌려다니는 인물이 되어간다.
굴욕(l‘humiliation). 처음에는 상대방을 서민(la classe moyenne)이라 깎아내리는 것이 ‘상대에게 창피를 주는 일’로 여겨졌던 것에서 출발해서, 이 ‘창피주는 행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지를 뻗어나간다. 끌로드가 라파의 어머니를 탐하는 것. 또는 그러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 또는 하나의 가정(家庭)을 탐하는 것. 제르망이 수업시간에 라파의 작문을 강제로 발표시키는 것. (라파의 표현에 따르면 급우들 앞에서 옷을 벗기는 것.) 일종의 추행(醜行)이자 수치(羞恥)다. 이것은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비대칭적인 존재와 존재 사이에 남는 몇 가지 모순들이다. 내밀한 영역으로 접근해 들어갈수록―집(la maison) 고유의 척력(斥力)이 있기라도 한 걸까―그러니까 가까워지려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우리는 그러한 저마다의 집이고 사람이고 존재라는 걸, 그러한 종합(総合) 안에 살아간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다시 읽어보니 참 산만한 글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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