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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게리 올드만일상/film 2020. 4. 11. 00:20
누군가가 요새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 산다는 말을 하던데, 나는 잠시 넷플릭스 알고리즘에 빠져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언제 어떻게 해서 이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의 작품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넷플릭스의 무료체험기간이 만료되는 날 본 마지막 영화다. 이게 분명 한국어로 자막이 달려 있기는 한데, 제대로 이해를 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첩보전을 벌이는 영국신사들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다. 혹시나 이게 실화를 기반으로 한 거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영화를 감상했는데, 감상한 뒤에 찾아보니 존 르 카르레의 첩보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전체적인 정보를 종합해 볼 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책보다 더 책처럼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활자로 된 책보다 많은 암시가 깔려 있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다채롭다.
나는 이 영화에서 서커스(영국 첩보단)에서 이중첩자인 ‘두더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카를라(KGB의 수뇌)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쏠렸다. 이 영화는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봐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무심하게 내버려두는 타입이라서, 영화를 보면 볼수록 연인 빌 헤이든(콜린 퍼스)을 우아하게 쏴죽여버린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가 카를라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사실 이 짐 프리도라는 인물은 영화의 맨 첫 장면에 떡하니 등장하기는 하지만, 팅커, 테일러, 솔저에 비해서는 비중이 낮다. 그러다가 부다페스트에서 생환한 그가 영화의 말미에 다시 전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연인에게 한 방 맞은 콜린 퍼스의 처연한 눈빛은 참...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눈빛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암살되었다고 알려졌던 그가 영국의 한적한 시골로 돌아와 쥐죽은 듯 교직 생활을 하고 있던 것, 그것도 무지바한 카를라의 고문실을 빠져나와 그랬다는 사실은, 정말 첩보원으로써 그의 효용이 떨어졌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 이상의 숨겨진 무엇이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한다. 이처럼 세상일에 초연해진 짐 프리도의 마음 언저리에 맴도는 학생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빌이다. 관찰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누구보다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싶은 어리숙한 소년 빌. 그리고 떠오르는 그의 사랑하는 연인 빌 헤이든. 빌 헤이든의 KGB 송환을 앞두고 짐 프리도는 아주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에게 죽음을 선물한다. 그런데 만약 나처럼 짐 프리도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스마일리(게리 올드만)와 컨트롤(존 허트)의 의미마저 오염된다. ‘두더지’ 빌 헤이든을 색출함으로써 다시 서커스의 왕좌에 복귀한 스마일리가 과연 모든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인지는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세련된 연기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콜린 퍼스의 역할이라면, 리키 타르(톰 하디)의 연기는 참 청승맞다. 이 영화는 사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서커스의 파티에서 러시아 국가를 부르는 와중에도, 사랑은 진행되고 치정은 기획된다. 톰 하디가 등장하는 장면은 꼭 신파극을 보는 것 같다. 그만큼 첩보원으로서는 정제되지 못한 감정, 초조함, 어리숙한 열정을 톰 하디는 여과없이 보여준다. 단 며칠 간의 만남으로 KGB의 여자 비밀요원 이리나에게 깊은 책임을 느끼는 그를 보면, 무뚝뚝하고 아주 전략적인 이들 남자들의 대화 안에, 숨을 고르는 감정의 거친 리듬이 베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느끼는 건, 점점 더 정보전이 고도화되는 오늘날에도 첩보전의 본질적인 속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가장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가장 내게 위험한 사람일 수 있고, 이러한 신뢰에는 개인적인 신뢰뿐만 아니라 국가간 신뢰까지 얽혀 있다는 것. 가장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영역에서 그 믿음이 의심스러워질 때, 그런 의심을 거두어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은 발본색원(拔本塞源)을 요한다. 뿌리뿐 아니라 뿌리에 달라붙은 흙먼지까지 털어내야 한다. 그래서 신뢰 문제는 어렵다.
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두 번재 게리 올드만 주연의 작품 <다키스트 아워>다. <팅커 테일로 솔저 스파이>보다 시점도 더 앞이다. 시점: 1940년, 상황: 나치 독일이 마지노 선을 뚫고 덩케르크를 포위하자 영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다. 네빌 체임벌린을 뒤이은 처칠의 전시 내각은, 여야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 가운데 다이나모 철수 작전을 추진해 나간다. 오스만의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뼈아픈 전술 실패,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언사, 충동적인 성격. 괴팍한 윈스턴 처칠이 여야와 왕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과정을 보며 정치란 이렇게 작동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가장 쉬운 길은, 또는 오랫동안 외교를 해왔던 베테랑 정치인들의 눈으로 보아도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나치 히틀러와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처칠의 정적(政敵)이었던 핼리팩스는 시종일관 평화협상을 관철하고,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임 수상 네빌 체임벌린을 비롯한 많은 각료들 역시 평화협상에 나서는 편에 선다. 그러나 처칠은 평화협상은 단지 한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며, 추축국이 말하는 평화협정 이후의 국면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는 나치 독일과의 평화협정 대신, 독일에 강경히 맞서 다이나모 철수 작전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싸워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는 분명 독선과 아집에 찬 어느 한 정치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처칠의 면면은 순수하다. 꼬마아이 같다. 그럼에도 국민의 재산과 생명이 달려 있는 전쟁 속에서 언행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치인의 순수함은 사실 필요치 않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칠은 카리스마 있고 리더십 있는 정치인으로 변모해 간다. 그는 원래 그렇게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영국의 의회정치, 그리고 용기 있는 국민들 안에서 만들어져 간다. 흔히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정치를 보며 비교적 이상적인 형태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해서 크고 작은 부패와 비리 스캔들, 국민을 선동하는 영악한 정치인들, 극단적인 이념에 경도되어 버리는 국민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위트. 정치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위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캐나다 망명을 주저하던 조지 6세의 지지를 얻는 과정이나 웨스트민스터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처칠이 그의 속기사 레이튼에게 할아버지처럼 이런저런 말을 거는 장면에서 윈스턴 처칠이라는 정치가의 위트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위트가 빛을 발한다. 이들은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전쟁의 안에 있고, 적의 포위망은 가까워져 온다. 그러나 위트를 잃지 않는다. 이런 비교를 하기는 싫지만, 과연 우리나라에서 한 번의 정책적 실패를 저지른 정치가에게, 사람들은 위트를 베풀어 줄 수 있을까? 영국인들의 용단과 처칠의 기적적인 리더십이 낳은 단호한 외교정책은 결국 5년 뒤에 올바른 결정이었음이 증명된다.
요즘 들어 어느 조직이든 리더십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함께 하는 리더가 만약 윈스턴 처칠 같은 사람이라면 정말 그의 리더십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치인이 왕실에 예의범절을 갖추는 모습이나 전철 안의 시민들이 윈스턴 처칠 앞에서 몸가짐을 고치는 모습은, 서열과 예를 따지는 동아시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다른 점 하나는 이미 말한 대로 위트다. 전쟁중에 한 정치인이 왕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루즈벨트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 생전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서 시민들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는, 그 시대를 견뎌가는 사회와 그 속에서 구현되는 정치를 긍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 나라의 국격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져 나가는구나 하는 점을 배울 수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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