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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일상/film 2020. 4. 26. 23:56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무능한 통치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릭한 면모가 매력적인 영상 안에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진 영화다. 또한 <킬링 디어> 역시 권할 만한 뛰어난 영화다. 묻힐 뻔했던 과거의 사건에서 촉발된 아슬아슬한 위기감이 주인공의 위선과 맞물려 살벌하게 전개되는 영화다. 한편 <송곳니> 역시 매력적인 영화다. 행동과 언어가 유리(遊離)된 인물들은 희한한 시스템을 쌓아올린 후 서서히 붕괴해간다. 또한 <더 랍스터>는 어떠한가? 제약된 공간 안에서 사랑이라는 자원을 두고 벌이는 남녀들간의 갈등상황은 그 모티브만으로도 충분히 기발하다.
야근 후 곧바로 잠을 청하기 싫었던 어느 하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뒤적이다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키네타>라는 작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4.99 달러를 결제한 뒤 시청했다. 자막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자막의 의미가 크게 없을 정도로 대사량이 많지 않고 나오는 대사마저도 아무 맥락이 없이 튀어나온다. 야근으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때 대사가 그리 많지 않은 영화는 편리하기도 하지만, 내용이 매우 난해하다는 점에서는 다시 골치가 아파온다. 이런 영화는 스토리를 읽으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총체적인 영화 실험이라 생각하고 보는 것이 속 편하다.
<송곳니>라는 영화를 인상깊게 봤었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조작된 소제국을 꾸리는 독재자(아버지)와 조력자(어머니), 이를 간파해나가는 자녀들의 모습이 독특하게 그려진 영화다. 기존에 내가 봤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점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키네타>는 그보다도 시점이 더 이전이므로 그야말로 데뷔 시점에 만들어진 영화다. 때문에 <송곳니>보다 더욱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초안(草案)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과연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일찍이 <키네타>라는 작품에서부터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시도해 왔다. ‘키네타’라는 어느 리조트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영화에는 수상한 중년의 경찰관, 사진작가, 그리고 리조트에서 일하는 한 여성이 등장한다.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 세 명의 등장인물은 ‘아마도’ 살인을 모의하고 연습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실전에서 성공을 거둔 듯하다.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 해안가가 아주 ‘막연한’ 이미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주 거칠게 흔들리는 앵글과, 피사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초점, 사건의 적극적인 주모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인물들의 초연한 모습들까지. 따라서 이 영화는 연결고리 없는 이들 인물들이 어떠한 사건을 기획하는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하게 그려진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겨냥했던 것(살인)이 실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 조우한 세 남녀의 시행착오, 무의미하게 공중에 휘발되어 버리는 낱말들, 준비되었지만 억지스러운 행동거지들. 이것들이 이 영화를 읽는 관건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러한 실험은 <알프스>에서도 계속된다. (참고로 처음에는 아이튠즈 스토어에 올라와 있는 <아텐버그>까지 마저 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접었다.) <알프스>도 <키네타>와 판박이 같은 스타일이라 어쩐지 식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급격히 의욕이 줄어들었다. 특히 <송곳니>를 포함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로봇보다도 더 로봇처럼 대사를 읊는다. 아무래도 연달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초창기 작품을 보다보니 배우들의 무미건조한 톤에 좀 질렸다. 추측하기로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이러한 연기를 활용하는 이유는 말의 덧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아마도 그런 것이 분명하다.) 단어를 분절시키고 (가령 전혀 합치하지 않는 알파벳으로 끝말잇기 놀이를 한다든가) 감정을 철저히 배제시킨 채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의도된 것들이다. <알프스>에서는 작중 인물들이 대체될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알프스'라는 그룹명을 택하지만 이는 일종의 말장난이자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결국 그녀는 테니스 선수를 대체할 수 없었으니까..)
<키네타>라는 작품을 통해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는 글을 어디서 봤는데, 나같은 일반인이 <키네타>를 봐서는 (<알프스>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영화의 어느 부분에서 평론가들이 감독의 재능을 발견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그가 후일 <킬링 디어>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처럼 흡입력 있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을 보면 평론가들의 안목은 적중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다시 초창기의 모티브로 회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초창기 실험들은 <송곳니>를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효능이 입증되었고, <더 랍스터>를 거치며 진화한 그의 새로운 장르가 더 개척되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이후 신작이 있던데 어떤 영화일지 기대가 된다.)
각설하고, 말의 공허함을 떠나 한 가지 더 예의주시할 점은 인간의지의 무의미함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초창기 작품들-여기서는 <키네타>, <알프스>, <송곳니>-에 나오는 인물들은 엄격한 규율과 변태적이라 할 만한 룰들을 지키며 나름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행위 아래에는 무수히 뜻 모를 동작과 호흡이 내재되어 있으며, 자유의지는 철저히 소외된다.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보이는’ 행동들은 그 의미가 굴절되거나 좌절되기 일쑤다.
<알프스>에 등장하는 간호사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사망한 여자 테니스 선수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잠시 가족들의 집을 방문해 선수의 옛모습을 흉내내기로 한다. 그러한 결정과 행위가 이미 위장(僞裝)된 것일 뿐 아니라, 그녀의 캐모플라주가 폭주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행동은 마침내 외면당하고 박탈된다. 한편 그녀와 그룹-여기에는 코치, 한 젊은 사나이, 체조선수, 그리고 간호사가 그룹을 이룬다-의 일원인 체조선수는 팝송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코치에 굴종함으로써 완전한 행복에 다다르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해 괴로워 하던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코치가 보는 앞에 아주 훌륭한 리본 연기를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혼란스러운 영화다.
하나 더 떠오를 수밖에 없는 질문은, 왜 요르고스 란티모스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이 그를 이런 해괴망측한 표현법으로 이끌었을까? 그게 왜 다른 국가도 아닌 그리스인 감독에 의해서인가? 여기서 ‘국가’라는 단서를 다는 이유는, 이들 세 초창기 작품들만큼 형이상학적으로 말과 행위를 다루기 위해서는, 영화가 배태된 사회가 기본적으로 말 또는 행위가 현실과 심각하게 괴리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 때문이다. 이런 영화는 차라리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서 사이버범죄가 횡행하는 한국사회에 더 걸맞지 않을까? 기호학이 발달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같은 감독이 안 나왔을까? 자유로운 행위나 발화(發話)가 곧잘 억압되는 독재정권 하의 동유럽 국가들은?
사실 나는 현대 그리스 사회에 대해 모른다. 내가 아는 그리스인들은 너무 오래된 사람들 뿐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는 현대에 이르는 역사의 노정 속에서 아랍인의 유입으로 혼종적인 성격이 더해지고, 최근에 와서는 유럽국가 중 가장 심각한 난민 문제에 봉착했다. 현대 그리스는 폴리스로 이루어진 점사회(點社會)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런 모습이라면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그리스 영화에 잘 그려져 있다. 아주 현실적으로. 한편으로 PIGS의 일원인 그리스는 2015년 국가 부도사태를 경험했다. 유럽이라는 연합 안에 포용될 줄 알았지만, 기대를 걸었던 바로 그 EU 주요국들로부터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았던 그리스. 그리고 장기화되는 경제문제로 인해 근래에는 수천 년 된 고대 유적지마저 외국인들에게 팔기 시작했다는 기사.
다른 한 편으로는 드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위대한 조련사>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2~3년 전 가을에 봤던 이 영화는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배우들의 ‘신체’를 철저히 분절시킨다. 마치 키네틱 아트처럼 움직이는, 때로는 나체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배우들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여기서는 분절의 대상이 ‘신체’가 되었을 뿐, ‘말과 행위’를 분해하고 편집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콜라주와 방법상의 성격이 똑같다. 그런 둘 모두 그리스 사람들이다. 도대체 오늘날의 그리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너무 많은데, 그리스의 현대 사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너무나도 없다. 그럼에도 현대 그리스인들의 철학이 빈곤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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