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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일상/film 2020. 5. 5. 20:56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는 앙투안이라는 소년이 비행 청소년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보고난 뒤, 누벨바그 두 편을 찾아보았는데, 그 중 한 편이 <400번의 구타>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도 그렇듯, 영화에는 파리의 풍경이 한가득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가 클레오라는 여인과 거울에 비친 클레오라는 환영(幻影)을 다룸으로써 아름다움(美)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 데 반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는 치기 어린 아이의 행동과 그 행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 통제되는 방식을 조명한다.
이 영화에도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만큼이나 거울이 자주 등장하는데, 앙투안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어쩐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왔던 말콤 맥도웰이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보기에 따라 앙투안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잘못의 경중(輕重)을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이 영화에서 앙투안을 나무라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인물들이니까. 앙투안을 겨냥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교사, 자신의 외도에는 관대하면서도 아들의 행실에는 엄격한 어머니,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때리는 아버지까지. 교정시설에서 소년들을 거칠게 다루는 훈육관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치 성숙하고 완성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이들 어른은 앙투안이라는 소년을 철부지와 미치광이라는 쇠창살 안에 가두어두어야 안심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에게 앙투안은 맞추기 쉬운 과녁이다. 광기가 그 자체로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충동(衝動)이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에 의해 기획되고 관리된다는 푸코의 진단은 이 영화 안에서 정확하다. 앙투안은 사회가 마련해 놓은 틀 안에서 광인(狂人)으로 성장해간다. 오노레 드 발자크를 기리는 앙투안의 사소한 동경심마저도 영화 안에서는 무시된다. 그러나 이 사회는 앙투안을 에워싼 인물들에게는 딱히 책임을 묻지 않는 듯하다. 소수의 비정상을 통해 다수의 정상을 확보하겠다는 사회의 구상은 성공한다. 일단 적은 수효(數爻)라도 본보기를 만들어두면, 그 다음에 다수를 추동시키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든 <빠삐용>의 죄수처럼, 교정시설을 탈출한 앙투안은 이윽고 바다에 다다른다. 우왕좌왕 흔들리는 앙투안의 눈동자를 보며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 해서 바다라는 것이 생겨났을까 하는 곤혹스러운 감정이다. 저 바다만 없었더라면 앙투안은 그를 짓이기는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반드시 촉법행위를 해야만 그 사람의 행동이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호(嗜好)가, 사람의 생김새가, 또는 됨됨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폄훼되기 일쑤다.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사전적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세상은 참 편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참 따분한 세상이기도 할 것이다. 시종 개구쟁이다운 웃음을 잃지 않던 앙투안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는 것이, 경찰서로 연행돼가는 차 안에서다. 그의 눈에서 거꾸로 멀어져가는 파리의 풍경은, 자신을 이 세계와 유리시키려는 뒤틀어진 동력 그 자체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60년에 개봉한 영화인만큼, 영화 속에 그려지는 히로시마라는 도시는 원폭의 참상을 담고 있는 장소로 그려진다. 더불어 히로시마라는 도시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툭 떨어뜨려 놓은 것마냥 철저한 이방인인 존재, 그녀(elle)의 이야기는, 또 다른 어떤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프랑스의 식민국 베트남에 가족을 따라서 온 한 소녀가 화교 출신 남성과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그 안에서 타국의 프랑스인으로서 어설픈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이야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의 이야기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각본을 바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맡았는데, 그녀의 글은 조금 독특하다. 낯선 아시아 사회에 들어선 여성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서구 사회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은 느끼기 어렵다. 그녀는 글을 통해서, 아시아 사회를 편견에 기반해 도식화한다거나 은연중에 우월의식을 내비치지 않는다. 대신 프랑스인의 몸에 벤 세계관과 현실인식을 고스란히 투영시킨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는 한 여인의 기억이 히로시마의 풍경과 병치되고 있다.
히로시마는 한 번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 보았던 원폭돔, 르코르뷔지에 풍의 평화 기념관, ‘安らかに眠って下さい、過ちは繰返しませぬから(편히 잠드소서, 과오는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라는 문구가 새겨진 추모비, 히로시마의 강변까지. 이곳에서 나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 바로 한 이자카야(居酒屋)에서였다. 바 형태의 식당에서 주인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며, 대한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원폭이 투하된 도시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인아저씨는 2차 세계대전을 가해자의 관점이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피폭으로 인해 사멸에 가까워졌던 도시 히로시마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역사에서 이긴 자들 (또는 가진 자들)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인상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관객에게 유달리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는 몸이 뒤엉킨 남녀를 확대한 화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들 몸에는 폭발 이후에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는 낙진(落塵)처럼 거친 입자들이 육체에 들러붙어 있다. 매끈한 살갗이 어우러져야 할 자리에 금속성의 재(灰)가 뒤덮은 장면에서 위화감마저 든다. 이는 이 영화가 이후에 풀어나가고자 하는 이야기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일병사와 사랑에 빠져 승전 이후 마을로부터 낙인 찍힌 경험이 있는 그녀(elle)는 머나먼 타국 히로시마에서 그(lui, 그는 원폭 투하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와 조우하고, 그녀를 에워싼 이미지와 감각들 안에서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그녀가 떠나온 고향의 이름은 느베르(Never). 기억의 상자에서 영원히 꺼낼 수 없을 것 같은 독일군과의 사랑, 건드릴 수 없는 기억, 히로시마 남자를 바라볼수록 강화되는 추억, 그리하여 점점 더 현실을 대체해버리는 과거의 시점. 그녀는 히로시마에서의 체류를 정리하고 파리로 되돌아갈 것임을 남자에게 예고하지만, 영화의 끝까지 그녀가 파리로 향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과거의 기억이 기다리는 공간으로 향하는 대신 방랑에 방랑을 거쳐 여전히 히로시마에 남아 있다. 완력으로 그녀를 통제하는 남자는 그녀에게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라는 존재를 일깨운다.
Je te rencontre.
나는 너를 만나
Je me souviens de toi.나는 너를 기억해
Qui es-tu?너는 누구지?
Tu me tues.넌 나를 죽여
Tu me fais du bien.너는 나를 만족스럽게 해
Comment me serais-je doutée que cette ville était faite à la taille de l’amour?이 도시가 사랑을 채웠다는 걸 어떻게 알지?
Comment me serais-je doutée que tu étais fait à la taille de mon corps même?네가 내 몸에 형상을 불어넣었다는 걸 어떻게 알지?
Tu me plais. Quel événement. Tu me plais.나는 네가 좋아, 웬 걸 나는 네가 좋아
Quelle lenteur tout à coup.이 얼마나 느릿한가
Quelle douceur.얼마나 달콤한가
Tu ne peux pas savoir.너는 모르겠지
Tu me tues.넌 나를 죽여
Tu me fais du bien.너는 나를 만족스럽게 해
Tu me tues.넌 나를 죽여
Tu me fais du bien.너는 나를 만족스럽게 해
J’ai le temps.나는 시간이 있어
Je t’en prie.사양할게
Dévore-moi.나를 탐해
Déforme-moi jusqu’à la laideur.추해질 때까지 나를 해체해
Pourquoi pas toi?왜 아니겠어?
Pourquoi pas toi dans cette ville et dans cette nuit pareille aux autres au point de s’y méprendre?너라고 왜 아니겠어? 이 도시, 이 밤, 이치를 잘못 깨달은 다른 이들처럼
Je t’en prie…괜찮아
Je te rencontre.나는 너를 만나
Je me souviens de toi.나는 너를 기억해
Cette ville était faite à la taille de l’amour.이 도시는 사랑으로 채웠어
Tu étais fait à la taille de mon corps même.너는 내 몸에 형상을 불어넣었어
Qui es-tu?너는 누구지?
Tu me tues.넌 나를 죽여
J’avais faim. Faim d’infidélités, d’adultères, de mensonges et de mourir.나는 굶주렸어, 불순함에, 간음에, 거짓에, 그리고 죽음에
Depuis toujours.늘 그랬듯이
Je me doutais bien qu’un jour tu me tomberais dessus.언젠가는 너도 내 위로 쓰러지겠지 의심을 해
Je t’attendais dans une impatience sans borne, calme.나는 견디기 어려운 초조함으로 침착하게 기다려
Dévore-moi.나를 탐해
Déforme-moi à ton image afin qu’aucun autre, après toi,
나를 해체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이미지로
ne comprenne plus du tout le pourquoi de tant de désir.
그러한 욕망을 더는 헤아릴 필요 없어
Nous allons rester seuls, mon amour.우리는 혼자일 거야, 내 사랑
La nuit ne va pas finir.밤은 끝나지 않아
Le jour ne se lèvera plus sur personne.낮은 누구에게도 찾아오지 않을 거야
Jamais. Jamais plus. Enfin전혀, 한 번도, 끝내
Tu me tues.너는 나를 죽여
Tu me fais du bien.너는 나를 만족스럽게 해
Nous pleurerons le jour défunt avec conscience et bonne volonté.우리는 양심과 선의로 지나간 날에 눈물을 흘려
Nous aurons plus rien d’autre à faire que, plus rien que pleurer le jour défunt.우리는 소멸한 날 우는 것 말고 달리 할 게 없어
Du temps passera. Du temps seulement.시간은 흐를 거야, 오로지 시간만이
Et du temps va venir.그리고 시간은 다가올 거야
Du temps viendra.시간은 올 거야
Où nous ne saurons plus nommer ce qui nous unira.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곳에서
Le nom ne s’en effacera peu à peu de notre mémoire.
이름은 우리의 기억에서 차차 지워지겠지
Puis, il disparaîtra tout à fait.그리고 완벽히 사라질 테야
Hiroshima, Mon Amour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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