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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르그랑(Michel Legrand)의 선율에 맞춰일상/film 2020. 6. 4. 22:35
어제는 34개 트랙에 달하는 미셸 르그랑(Michel Legrand)의 OST 앨범을 방에 무작정 틀어놓았다. 그리고 볼륨도 줄이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뮤지컬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흘러나오는 OST 곡들이다. 주인공들이 무도회장에서 불렀던 노래, 역 대합실에서 불렀던 노래, 보석상에서 불렀던 노래, 부둣가에서 불렀던 노래, 성당 앞에서 울려퍼진 노래, 주유소에서 재회한 옛 연인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가며, 소리를 통해 영화 속 장면들을 되겼다.
한동안 누벨바그의 흑백 영화만 보다가 총천연색의 뮤지컬 영화를 보니 산뜻한 기분이 든다. 코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의 작품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 꺄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의 노련한 연기를 떠올리면서, 젊은 시절의 풋풋한 그녀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남자주인공 역(기 푸셰, Guy Foucher)을 맡은 니노 카스텔누오보는 익숙하지 않은 배우라서 필모그래피를 찾아보았는데, 출연한 영화가 열 편이 채 안 된다. <쉘부르의 우산>이 큰 성공을 거둔 작품 치고는 작품활동이 아주 적은데, 그 중의 한편이 <아메리칸 페이션트>여서 다음에 볼 영화는 이 영화로 점쳐 둔 상태.
<여행le voyage>, <부재l’absence>, <귀환le retour>의 세 장(章)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 쥬느비에브(Geneviève)와 기(Guy)가 달콤한 사랑에 젖어 있는 이야기 - 기(Guy)가 알제리 전투에 징집되어 있는 동안 꺄사흐(Cassard)가 쥬느비에브에게 구애하는 이야기 - 쥬느비에브와 기가 각자의 가정을 꾸린 뒤 해후(邂逅)하는 이야기까지의 아주 명료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 플롯이 많이 몰려 있는데, 사랑스럽지만 현실적인 새드엔딩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딸 프랑수아즈(Françoise)를 보지 않겠다는 기의 단호한 한 마디는 사랑의 끝에 남아 있는 감정의 여운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기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여성은 막달라(프랑스이름 마들렌; Madeleine)였고, 쥬느비에브는 옛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꺄사흐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기와 마들렌 둘 사이에는 프랑수아(François)가 프랑수아즈와의 대칭점에 놓여 있다. 어떤 의미에서 쥬느비에브의 선택은 일견 파렴치하면서도, 전쟁이 벌어지던 시대배경과 그녀의 처연한 처지를 고려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야속한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예전 같았으면 너무나도 장난 같은 운명이라 여겼을 법한 이야기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이야기로 들리는 걸 발견하며, 내 나이도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낭만적인 이들의 이야기에 비해 쉘부르라는 도시는 그리 인상에 남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건 쥬느비에브가 기를 떠나보내던 역사(驛舍)에 새겨진 역명 "Cherbourg"와 처음에는 쥬느비에브가 기와 함께 걷고 나중에 꺄사흐와 함께 거니는 검정 크레인이 위압적인 부둣가 정도. 오히려 전쟁통에 군모를 쓴 용사들이 침울하게 거리를 오가는 모습,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우산을 펼친 사람들의 모습에서 쉘부르라는 도시는 우중충한 분위기마저 풍기지만, 어쩐지 노르망디의 이 도시를 한 번 여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격언이 통하는 영화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가 떨어져도 애틋할 수 있음을, 그리고 인력(人力)으로도 어찌할 도리 없는 척력(斥力)을 띤 인연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그린 영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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