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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like looking at a view. Men don't.”
<전망 좋은 방Room with a view>은 한 번도 귀에 접해본 적이 없는 영화다. 1986년에 제작된 영화가 재개봉한 것을 보면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하루는 일찍 일을 마치고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와 <다키스트 아워> 이후 오랜만에 보는 영국 영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개인적으로 영국 영화는 심심한 느낌이 있다. (부정적 의미가 아닌 비교의 의미에서 그렇다.) 아무래도 젠틀맨(Gentlemen)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를 내세우거나, 행동을 단정하게 가다듬거나 하는 모습이 어쩐지 섬나라 특유의 점잔 빼는 느낌이 있다. 섬나라라는 온화한 분위기 안에서 형성된 특유의 완고함과 약간의 결벽성. 어쨌거나 이 영화는 피렌체에서 만난 영국인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감성을 담고 있다. 우중충한 영국인의 기벽과 이탈리아인의 낙천성, 로맨스가 결합된 감미로운 스토리다.
“He's the sort who can't know anyone intimately, least ofall a woman. He doesn't know what a woman is. He wants you for a possession, something to look at, like a painting or an ivory box. Something to own and to display. He doesn't want you to be real, and to think and to live. He doesn't love you. But I love you. I want you to have your own...”
베토벤의 곡을 열정으로 연주하는 루시 허니처치와 단테의 구절을 읊조리는 조지 에머슨. 시뇨리아 광장에서 우연히 목격한 두 이탈리아인의 난투와 뜻밖의 죽음은 이 두 남녀의 관계를 급속도로 진전시킨다. 격렬하고 다혈질적인 두 남자의 싸움에 이윽고 한 이탈리아 남자가 피를 토하자 그 광경을 본 루시 허니처치는 광장 한복판에서 그대로 혼절한다. 이때 그녀를 구출하는 것은 숙소(베르톨로지 호텔)에 묵고 있던 조지 에머슨. 에머슨 부자(夫子)는 일찍이 루시와 그녀의 사촌언니 샬롯에게 전망이 근사한 방을 양보한 바 있다. 한편 광장 위에 쓰러지면서 루시가 흘린 그녀의 사진은 각혈(喀血)에 흥건히 젖어버린다. 에머슨이 무질서를 뚫고 그녀에게 사진을 되찾아주는 것 같지만, 루시와 다리 앞에서 선 에머슨은 돌연 아르노 강으로 그 사진을 던져버린다. 피사체에 불과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피사체라도 현실에 존재할 때 여봐란 듯 의미가 태어난다. 이것이 루치 허니처치가 여행책자(Baedeker) 없이 나선 피렌체 거리에서 마주한 세상이다.
“But you have been lying to everyone... including yourself.”
“There's only one thing impossible - that's to love and to part.”
늘 물음표를 머릿속에 품고사는 청년, 조지 에머슨. 더 이상 물음표만 던지지 말고 어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길 바라며 마음 깊이 아들을 걱정하는 에머슨 씨. 이와 반대로 지적인 허영심에 가득차 있지만, 정작 현실 안에서는 마냥 어리숙하고 서투르기만 한 루시의 약혼자 세실(Cecil). 에머슨과 세실 두 남성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루시에게 구애(求愛)하고, 영화가 전개될 수록 승기(勝旗)가 어느쪽으로 기우는지 점점 명확해져 간다. 정제된 형태는 아니지만 솔직하고 투명한 에머슨의 마음과, 세련된 교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상대보다 자신을 앞세우기에 급했던 세실의 박자에 맞지 않는 언행, 이 둘 가운데 루시는 어떠한 선택을 내렸던가.
"Mistrust all enterprises that require new clothes“
영화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 잠시 인용된다. 일하러 가기 위해 다른 옷을 입어야 할 때에는 조심해라. 에머슨 부자가 서머 스트릿의 빌라에 들인 옷장 모서리에 새긴 글귀다. 실로 영화 속에는 영국 귀부인과 신사들의 아름답고 다채로운 고전복장이 많이 등장한다. 요컨대 외양보다는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라는 것이 소로의 인용구가 갖는 의미일 것이다. 사랑은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흔한 이야깃거리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단지 사랑을 둘러싼 관계도만을 따라가서는 자칫 진부한 러브스토리로 빠져버릴 수 있다. 이 영화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형상을 부여해 나가는 이야기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한 면에서 루시가 자신의 진가(眞價)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길 바랐던 비브(Beebe) 목사의 소년 같은 시선에 마음이 따뜻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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