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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알프레드 히치콕일상/film 2020. 6. 30. 00:38
요즘처럼 영화 개봉이 지지부진할 때에는, 흥행성이 담보되는 옛 영화들이 재개봉하곤 한다. 하지만 꼭 요즘같은 때가 아니어도,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뜸하다가도 잊을 만하면 재개봉을 하곤 했었다. 나도 이야기로만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접했지, 막상 그의 영화를 본 건 <새The birds> 정도다. 그러던 중 최근에 그의 작품이 재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현기증Vertigo>을 보았다. 58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고 이전에 <새>를 흑백으로 봤던 기억이 있어서 <현기증>도 당연히 흑백영화일 줄 알았는데 풀컬러로 되어 있어서 아주 좋았다. (반면 뒤이어 소개할 <싸이코>는 <현기증>과 달리 다시 흑백으로 돌아가서 잠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현기증>에 묘사되는 다양한 소재들―붉은 빛을 발하는 금문교의 풍경, 매들린·주디가 입는 옥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회색정장, 미술관에 걸려 있는 어느 여인의 육감적인 초상―은 흑백이 아닌 자연색으로 표현될 때 더욱 진실하고 유의미하게 비춰진다.
<현기증>은 60여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을 만큼, 인간 심리의 취약성(脆弱性)에 대해 세밀하게 스케치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흠뻑 몰입해서 보는 영화가 있는데 <현기증>이 그런 영화다. (이렇게 주의를 잡아당기는 작품을 만난다는 건 한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사실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내가 어떤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영화를 다 본 뒤에 영화의 장면과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mise-en-scène)을 곰곰히 곱씹어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단연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남자(존 퍼거슨)의 현기증이다. 나는 이 '존'이라는 인물에 대해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성인'이라 정의내리고 싶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미묘하게 여운을 남기는 장면은 영화 초반부터 일찍 등장한다. 샌프란시스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존의 옛 약혼녀(밋지 우드)의 사무실. 밋지는 새로운 여자속옷을 디자인하고 있고, 현기증으로 경찰직에서 물러난 존은 맥빠진 모습으로 카우치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다. 어깨끈 없이 가슴을 고정해주는 속옷 디자인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존에게 밋지는 "이제는 알 나이도 됐잖아. 넌 다 큰 어른이야. It's a brassiere. You know about those things. You're a big boy, now."라고 부드럽게 일침한다.
Only one is a wanderer; two together are always going somewhere.
다소 무성애(無性愛)적인 무드를 띠는 두 남녀(존과 밋지)의 대화 속에서 이들의 상반된 모습이 발견된다. 존은 퇴행하는 인물이다. 반면 밋지는 (비록 영화 속에서 비중있는 인물은 아닐지라도) 진취적인 인물이다. 존은 외양은 어른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늘 과거의 특정시점에 머물러 있다. 존은 맥키트릭 호텔(Hotel McKittrick)에서 매들린 엘스터(Madeleine Elster)의 환영(幻影)을 뒤쫓는가 하면, 엠파이어 호텔에서 만난 주디 바튼(Judy Barton)에게서는 끊임없이 옛사랑의 흔적을 갈구한다. 자신의 바람대로 기억을 반추(反芻)하고 현실을 끼워맞추는 존 스카티의 집착은 점점 유치한 유희(遊戱)로 변질되어 간다. 하필이면 존에게 덫을 놓았던 여자의 이름 '매들렌'으로부터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을 입에 넣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이처럼 존은 관념과 실재 사이에서 괴리를 겪고,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마침내 현기증으로 발현된다.
Anyone could become obsessed with the past with a background like that!
대학시절 존의 고백을 뿌리친 적이 있는 밋지는 영화 곳곳에서 다시금 존에게 구애(求愛)하지만 이는 결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특히 리전 오브 아너(Legion of Honor; 레지옹 도뇌르) 미술관에서 매들린이 벤치에 앉아 구경하곤 하던 여인의 초상화를 베끼면서, 얼굴만을 자기 자신(밋지)의 초상으로 치환(置換)시킨 그림을 존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영화의 긴장감이 크게 고조되는 대목이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했는데, 밋지로서는 존이 푹 빠져 있는 그림 속 여인을 자기 자신으로 교체함으로써, 존의 리비도가 자신을 향하도록 이미지를 조작하려는 것이다. 다소 과격한 밋지의 구애방식은 존의 거부감을 유발할 뿐이고, 이와 맞물려 주디에게서 매들린의 자취를 더듬어내려는 존의 집요한 기행은 날로 더해간다.
Here I was born, and there I died. It was only a moment for you; you took no notice.
금문교에 가기 전, 그러니까 매들린이 샌프란시스코 만에 뛰어들기 전, 존과 매들린이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모두 가장된 연기이기는 했지만) 맹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매들린은 자신이 언제 어디를 다녀왔는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한다. 여기저기 방황하는 일만이 자신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하는 매들린에게, 존은 둘이 함께라면 어디든 가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유령처럼 그(존)와 함께하는 기억의 그림자. 과거의 망령(亡靈). 매들린 엘스터와 주디 바튼이 모두 소거(消去)되어버린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존의 현기증은 해소될 수 있을까? 세콰이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매들린이 말한 대사에 빗대어 보면 "기억이란 태어난 곳에서 죽는다." 그리고 기억의 공백 안에서 또 다른 기억이 잉태된다. 좌우로 움직이는 기억의 추(錘)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것은 존의 몫. 존의 심리 근저에 짙게 깔린 현기증은 허공에서 허둥대는 그의 다섯 손가락을 또 한 번 보기좋게 빠져나갈까.
<싸이코Psycho>는 시점상으로는 <현기증>보다도 나중에 만들어졌는데 다시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영화의 무대가 산뜻하고 지중해풍 바다가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허허벌판 황야뿐인 애리조나의 피닉스라는 도시이기 때문에, 천연색이 갖는 효과가 퇴색되기는 해도 아쉬운 면이 있었다. 나는 젖은 머리의 여주인공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스틸컷이 늘 인상적이라 생각해 왔었고, 내심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떠올리면서 이 작품에 큰 기대를 걸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샤이닝>만큼 쫄깃한 느낌은 덜했다. 또한 인간심리의 여러 층위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앞서 보았던 <현기증>과도 공통분모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데, <현기증>과 비교해서도 매력이 덜했다.
“Norman Bates No Longer Exists. He Only Half-Existed To Begin With.
And Now, The Other Half Has Taken Over. Probably For All Time.”
내 뇌리에 깊이 각인(刻印)되어 있던 여주인공(마리온 크레인)이 절규하는 장면까지는 확실히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빠르게 엄습하는 두려움, 주위를 서성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불안감. 살아 움직이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얼굴 표정을 보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예의 스틸컷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의의 피습을 당한 이후에 욕실 타일 위로 머리부터 고꾸라진 마리온 크레인의 초연한 눈동자가 시선을 빼앗는다. 그리고 아직 삶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비추는 카메라의 앵글. 이 장면은 정말이지 <현기증>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줌아웃 트랙인 기법을 능가한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으로 꼽는 명장면이다.
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영화의 끝장면에서 웬 정신분석학자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살인 피의자 노먼 베이츠의 심리 해부를 마친 이 정신분석학자는 노먼의 양가적(兩價的)인 정신상태와 붕괴된 인격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요(要)는 노먼 베이츠라는 젊은이가 이런저런 개인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지킬 앤 하이드'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정신분석가가 자랑이라도 하듯 노먼 베이츠의 행적과 심리상태에 대해 너무 많은 주석을 달기 때문에, 이전까지 <싸이코>라는 영화의 러닝타임 전반에 실렸던 여러 은유(métaphore)와 상징들이 급격히 빛을 잃는다는 점이다.
“NO ONE REALLY RUNS AWAY FROM ANYTHING.
IT’S LIKE A PRIVATE TRAP THAT HOLDS US IN LIKE A PRISON”
그냥 <샤이닝>이나 <아메리칸 사이코>처럼 요주인물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냈다면 관객은 더 오랜 기간 여운을 안고 극석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쭐대는 정신분석가 덕분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도 전에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 더 이상의 궁금증은 남지 않는다. 그저 개인적인 추측을 덧붙여보자면, 아마도 히치콕이 살았던 시대에는 다중인격을 숨긴 채 살아가는 싸이코라는 캐릭터를 대중들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여전히 유쾌한 방식으로 건져올릴 수 있는 언어유희를 나는 'Stuff'라는 단어에서 찾았다. 크레인을 1호 객실로 안내한 노먼은 갑자기 방 안이 너무 갑갑하다(Stuffy)며 외부로 향한 창문을 열어 환기(換氣)를 시도한다. 또한 리셉션 뒤편 사무실에서 크레인과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자신의 값싼 취미를 소개하는데, 그 취미는 바로 박제(Stuffed Animals)다. 자신을 부자유하게 하면서 동시에 진실이라고 여기기에는 꺼림찍한 어떤 존재. 자신을 휘감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하는 허상(虛像). 야금야금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는 크레인을 바라보던 노먼이 그런 그녀를 향해 '먹는 모습이 새를 닮았다'라고 할 때, 노먼은 속이 톱밥으로 가득한 박제된 새를 떠올리면서도, 새장에서 풀려나 자유로이 허공을 가르는 파랑새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작품은 아직도 보고 싶은 것이 많지만 근래에 <현기증>, <싸이코>를 접했다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미디어와 플랫폼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겠지만, 영화관에서 직접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참에 <이창>까지 다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건 이 두 작품까지였고 다음에 또 다른 어느 영화관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상영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두 편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영화 안에서 허투루 허비하는 동작이나 대사가 없고 빈틈없이 스토리가 흘러간다는 점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처음 맥거핀(macguffin)이라는 개념―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도구나 장치, 가령 <싸이코> 속의 4만 달러짜리 돈다발―을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맥거핀이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극의 긴장감은 이로써 한층 상승한다.
한편 오늘날에도 짜임새 있는 영화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반 세기 전의 작품이 갖추고 있는 구성(構成)과는 어딘가 다른데, 어느 지점에서 갈래를 달리 하는지 딱 꼬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분명 오늘날에는 더 이상 <현기증>이나 <싸이코>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래에 수작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의 이른바 '좋은 영화'들은 알프레도 히치콕의 작품들이 갖는 순차적인 플롯의 엄밀성보다는, 시점(時點)을 자유로이 교차시키며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중에는 <1917>이 히치콕다운(?) 정밀(精密)함이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알프레드 히치콕의 천재성에 아직까지도 쉽사리 비견될 수 없는 부분은 그의 탁월한 주제 선정―어떻게 인간을 공격하는 새떼를 주제로 <새>라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과 새로운 촬영기법을 도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대담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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