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공간 두 개의 시간일상/film 2020. 7. 13. 23:24
차라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멀리, 영원히 도망가라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p.22,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엘레나 페란테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실'이라는 말을 참 자주 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 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
―p. 450~451,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엘레나 페란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달걀 껍질과 흰자 속에 갇힌 논색 빛이 감도는 상항 노른자 맛이 입 안에 느껴지는 것 같았어. 깨져서 속이 드러나 보이는 삶은 달걀 말이야. 입 속에 독이 든 달걀 같은 별을 머금은 느낌이었어. 고무 같은 질감의 하얀 별빛이 새까만 아교 같은 밤하늘과 함께 이빨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았어. 구역질을 참으면서 그걸 잘게 부수면 입 속에서 모래알 부서지는 느낌이 났지.···내 머리는 언제나 틈새를 찾아내거든. 사방팔방에서 현실 너머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 보이는 틈새를 찾아내고 말지.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거나 다시 시작하지.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밝혀내기도 하고 뭐든 튼튼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파괴하거나 부서뜨려 버리지.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두려움은 정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틈 속에 언제나 존재해. 그곳에서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레누. 언제나 그럴 거라고 의심해 왔었는데 오늘 저녁 확신을 가지게 됐어.
―p. 240~242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中, 엘레나 페란테
카를로스 디에구스(Carlos Diegues)의 <바이 바이 브라질> 이후 브라질 영화는 정말 오랜만에 본다. <바이 바이 브라질>은 80년대 영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유랑극단을 연상시키는 흑백영화다. 이번에 본 <인비저블 라이프(포르투갈어 원제:A Vida Invísivel de Euridice Gusmao)>는 사실 보려고 시간을 낼 수 있을 때쯤이면 이미 스크린을 내린 상태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영관의 수도 많지 않았고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대도 어정쩡해서 아무래도 영화관에서 보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결국 오랜만에 나온 포르투갈어 영화를 보겠다는 나의 의지가 더 작용해서 영화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a^;;
배경은 리우데자네이루.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이주해 온 한 일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어딘가 유럽적인 분위기가 있다. 언니 귀도와 동생 에우리디스 각각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그러면서도 미묘하게 엇갈리게―그린다는 점에서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연작과 매우 흡사하다. 서로 다른 형태로 찾아온 인생의 풍파 안에서 의연하게 자신의 내적 균형을 찾아나가는 두 여인의 일대기를 그린 이탈리아 장편소설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은 나폴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리우데자네이루와 나폴리 둘 모두 손꼽히는 미항(美港)이라는 점에서도 항구의 하늘하늘한 정취가 닮아 있다. 나폴리는 우리에게 맛의 고장에다 아름다운 항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이탈리아 남부에 속하는 이 지역에는 특유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숨결이 베어 있다. 그런 점에서도 우거진 삼림(森林)과 인간의 거주공간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리우데자네이루와 꼭 닮은 꼴이다. 리우데자네이루(또는 나폴리)라는 응집(凝集)된 공간과 그 안에서 꿈틀대고 뻗어나가기도 하는 두 인물의 시간과 중첩된 애증(愛憎).
이 영화가 『나의 눈부신 친구』와 가장 맞닿아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일 것이다. 가부장제 또는 폭력적인 남성의 권위 아래에서, 점점 더 평형(平衡)을 잃어가는 두 자매(귀도와 에우리디스)의 삶. 세파(世波)에 풍비박산 난 어릴 적 꿈과, 꿈을 잃게 만든 자들에 대한 원망마저 점차로 희석되어 가는 두 친구(릴라와 레누)의 이야기.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중력과 정답이라고 여겼던 삶의 방향이 오답임이 밝혀졌을 때 느끼는 뿌리 깊은 환멸감. 정신적으로 허약해진 그녀들을 구미를 당기는 먹잇감처럼 군침을 흘리며 지켜보는 세상사람들. 에우리디스가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삶에 첫 경력을 찍었다고 생각했던 순간 찾아온 거대한 상실감. (또는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에서 레누가 작가로서의 성공을 그려가면서 경험한 인생의 떫은 맛) 그런 세상살이의 고달픔이 14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고스란이 녹아들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식민국이었지만 타향인 브라질로 건너와 정착하지만 평탄한 삶에서 멀어져 간다는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로마>가 떠오르기도 하고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연인(l'amant)>이 떠오르기도 했다. 뒤의 두 영화는 각각 멕시코의 멕시코시티(로마 구역)와 베트남의 중국인 거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꼭 원주민이 등장한다. <로마>에는 크리오요(Creole) 가정을 돌보는 인디오 가정부가, <연인>에는 프랑스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중국인 화교가 등장한다. 브라질 자체가 매우 다문화적인 국가인 만큼, 영화 <인비저블 라이프>에는 항해를 나온 그리스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원주민과 유럽인간의 혼혈인 물라토도 다수 등장하고 흑인 탐정도 등장한다. 이런 이색적인 장면들이 이야기에 환상적인 느낌과 개연성을 불어넣는다.
남미 영화에 대해 잘 모르기도 모르거니와, 막연히 남미소설이 그렇듯 영화도 마술적 사실주의를 표방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감독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여성들이 처한 녹록치 않은 현실과 간절한 우애를 세밀하게 그린 영화였다. 영화의 엔딩은 정말 이렇게밖에는 풀릴 수 없었던 건가 싶지만, 이마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과 닮아 있다. 영화 속 에우리디스와 귀다의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입술과 혀의 파열로 뻗어나온 '말'이라는 것은 하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終]'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녹색광선(Le rayon vert) (2) 2020.08.06 하이파 거리(شارع حيفا) (0) 2020.07.22 두 편의 알프레드 히치콕 (0) 2020.06.30 시간을 수선(修繕)해 드립니다 (0) 2020.06.28 전망 좋은 방 (0) 20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