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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광선(Le rayon vert)일상/film 2020. 8. 6. 03:05
Vous parlez de montrer des choses ...
당신은 사물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말하죠..
Je ne sais pas, je n'ai rien. Les choses ne sont pas évidentes pour moi. Je ne suis pas normal, comme toi.
저는 모르겠어요, 가진 것도 없구요. 모든 것이 제게는 명료하지 않아요. 저는 당신만큼 평범하지 않아요.
Quand je fais un effort, j'essaye d'écouter, de parler aux gens. J'écoute, je regarde ce qui se passe.
노력을 하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얘기도 하구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듣고 보기도 해요.
Si les gens ne viennent pas à moi, c'est parce que je ne vaux rien et ...
만약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건 제가 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일 거고..
Si j'avais quelque chose à montrer, les gens le verraient, c'est tout.
제가 드러내보일 게 있다면, 누군가는 오겠죠. 그게 전부예요.
지아장커(賈樟柯)의 작품을 보겠다고 중고 DVD까지 구입하고 스탠리 큐브릭의 또 다른 작품도 구입해 놓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요새는 영화를 볼 여유가 전혀 없다. 아니면 볼 생각마저 사라졌다고 할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해마다 시네바캉스라고 해서 여름 휴가 기간에 오래된 작품들을 2주쯤 상영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독특한 옛 영화들을 봤던 기억밖에 없어서, 시네바캉스 때 상영된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번에 모처럼 시네바캉스에 맞춰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결국 영화 보러 영화관 갔다는 얘기;;) 여하간 이전까지 에릭 로메르라는 감독을 알지도 못했고 인터넷에 소개된 포스터만 봐서는 무슨 영화인지 잘 모르겠지만,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들은 대체로 좋았다.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다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작품은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습관적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여주인공 델핀은 여름 휴가를 계획하지만,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는 사람이 짜증날 만큼) 모든 휴가 계획을 어그러뜨린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건 덤. 도대체 이 사람은 뭐가 문제인 걸까, 다 큰 어른의 응석을 받아주는 듯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뭔가 싶기도 한데, 영화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를 더 모르겠다.
영화에는 대화가 꽉꽉 들어차 있다. 자신이 왜 채식주의를 택하는지, 왜 새로운 만남을 거부하는지, 왜 이렇게 불행한지. 오늘 점심에 만난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모두가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 대화의 맥락 안에서 말의 요지는 우리 모두가 비범하거나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평범(또는 보통)이라는 쉬운 말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둠으로써, 표준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했을 때 불편함, 나아가서는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도 개개인이 서로 많이 다른데 말이다. 평범하다고 뭉뚱그리기는 해도 모든 이가 똑같은 형태로 평범하다는 게 더 이상하고, 그럴수록 '평범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 된다.
델핀이 바로 그렇다. 무엇이든 모호해보이고 불확실해보여서 다가가기는 어렵고, 누군가가 선뜻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자신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자신이 없다.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왜 자기 안에 갇혀 사느냐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이때마다 델핀은 중언부언 변명을 늘어놓지만 스스로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에릭 로메르가 이 영화를 통해 그리고자 의도했던 것은, 단지 델핀이라는 여성이 자신을 헤아려주는 상대를 만나는 로맨스가 아니라, 통념에 끼워맞추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당하며 괴로워하는 어느 개인의 강렬한 독백이었을 것이다.선문답(禪問答)에서 헤어나지오지 못하는 델핀에게서 어쩐지 내 모습을 발견했다. 망설이고 주저하곤 하는 모습. 망설임의 상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도전을 해보기에는 잃는 것이 많을 것 같아 머뭇거리는 모습일 수도 있다. 손가락 사이로 보란듯이 빠져나가는 만남, 기회, 목표. ‘녹색(le vert)’라는 키워드에 꽂힌 델핀에게는 녹색광선을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아주 쾌청한 석양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녹색광선은 영화속 대화에 따르면 쥘 베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당장 읽어보고 싶었는데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파리와 쉘부르(Cherbourg)뿐만 아니라 알프스와 비아리츠(Biarritz)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휴가를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그녀는 마침내 생장드뤼즈(Saint-Jean-de-Luz)에 이른다. 비아리츠 역의 대합실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함께.
녹색광선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현상인지 아니면 그럴 듯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걸 만큼 용기를 지니게 된 델핀이 자신의 마음속에 녹색광선을 틔우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저 뿌연 노을 안에서 매일 같이 넘어가는 해를 꿀꺽꿀꺽 삼키기만 한다면 삶은 앞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음이 아주 따뜻해지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뜨끔하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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