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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燃燒)의 미학 : 결자해지 또는 사필귀정일상/film 2020. 8. 18. 22:55
1. 결자해지(結者解之)이거나
얼마 전 에릭 로메르의 작품을 한 편 더 보았다. 셔츠가 앞뒤로 슬슬 젖을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에릭 로메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죄다 수다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L’ami de mon amie)>에서 약간 눈여겨볼 점이 있는데, 바로 영화 속 다채로운 색에 대한 부분이다. 해변을 비롯해 자연풍광을 즐겨담은 에릭 로메르가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에서는 파리 근교도시를 배경으로 택했다. 이곳에서 에릭 로메르는 색(色)에 대한 미적 감각을 여과없이 발휘한다.
영화의 배경은 세르지 퐁투아즈(Gergy-Pontoise). 파리의 북동쪽에 위치한 신도시로 일찍이 60년부터 기획되기 시작한 곳이다.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1세대 신도시인 분당과 일산 정도가 될 텐데, 이곳 세르지 퐁투아즈는 파리만큼의 북적임은 없지만 공화정 느낌이 나는 로마풍 건물이 정갈하게 들어서 있으면서도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져 감각적인 분위기가 있다. 새로이 조성된 도시는 인공호수를 끼고 있고 저 멀리는 파리의 시내 라데팡스(La defense)가 바라다 보인다. (실제로 많은 신도시의 표본이 되는 곳이라고 한다) 여하간 이곳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주인공 블랑쉬는 모든 장면에서 빨주노초로 된 원색적인 복장으로 출연하는데 발랄하고 사랑스럽다. 잘 정돈된 수조(水槽) 속을 헤엄치는 빨간 금붕어처럼.
블랑쉬가 여사친(레아)의 남사친(알렉상드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첫 단추를 꿰지만, 결론적으로 블랑쉬는 여사친(레아)의 남자친구(파비앙)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사친(레아)는 블랑쉬가 접근하려던 남사친(알렉상드르)과 연인이 된다는 비현실적이고 불가해한 스토리라인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의 감정을 저울질하는 내용까지는 좋은데, 자칫 진짜 아무런 의미와 맥락없이 이야기가 공중분해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순간 유쾌하게 매듭이 지어진다. 분명 영화를 보며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관객들과 함께 실소(失笑)하게 되고, 이 이야기의 끝이 대충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흘러가는지 예의주시하게 된다.
큰 생각을 하지 않고서 넋놓고 보아도 괜찮은 영화다. 사랑과 연애 문제에 있어 남녀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실망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냥 인간관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 살아가는 게 다 이런―별 것 아닌데 목매고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꼈다가도 뜻밖의 사건에 별 일 없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건가 싶기도 하다. <녹색광선>의 주인공이 늘 심각하고 우울했다면,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더 쾌활하고 정념에 가득 차 있다. 특히 기분이 전환되는 영화였다.
2. 사필귀정(事必歸正)이거나
히어로물이 아닌 이상 주인공의 이름을 영화제목을 삼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데, <배리 린든>이라는 영화제목을 듣고 처음에는 어떤 영화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전설적인 인물 중에 이런 인물도 있었던가 궁금증을 떠올리면서, 그저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이라는 것만 믿고 먼저 작품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배리’이기는 한데 영화의 첫 장(章)―영화는 러닝타임이 177분이라 전반부-(인터미션)-후반부로 나뉜다―까지는 ‘레드몬드 배리’로 불려서, ‘배리 린든’이라는 온전한 이름을 얻기까지 좀 더 이야기 전개를 지켜봐야 한다.
좀 놀랐던 건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이 ’75년도라는 사실이다. 사실 그동안 봤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은 대체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스페이스 오디세이>)나 그 구조 안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신경증적 현상(<시계태엽 오렌지>나 <샤이닝>)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런 그가 <배리 린든>과 같은 시대극을 만들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리고 소품이나 장면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도 완성도가 높아서 놀랐다. (완성도가 높다는 것은 단지 누가 보아도 빈틈이 없어 보인다는 의미다)
영화 리뷰를 남길 때는 보통 기억에 남는 대사들을 원문으로도 찾아보고, 배우나 감독의 정보도 구글링해보곤 하는데, 한 번 더 놀랐던 것은 이러한 시대극 드라마 이전에 이미 <시계태엽 오렌지>와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각각 ’74년도와 ’68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배리 린든>을 통해 앞서 시도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에 도전한 것이다. 그런데 <배리 린든>에 뒤이어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작품이 극한의 심리극을 담은 <샤이닝>으로 다시 장르가 완전히 뒤바뀐다. 이만큼 아주 재빠르게 변모하며 각양각색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나는 필모그래피가 잘못 나열된 줄 알았다.)
영화는 소설(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작품)이 원작인데, 소설에는 어떻게 그려지는지 모르겠지만 풍경이 참 아름답다. ‘레드몬드’가 배리 린든이라는 후작명을 얻기까지의 전반부 스토리 라인은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했다. 치정(癡情)으로 인한 결투 끝에 더블린으로 도망치려던 어리숙한 아일랜드 소년 레드몬드. 이 풋내기 소년은 당시 유럽의 7년 전쟁 상황 속에서 크고 작은 공적을 쌓아가며 생존을 향해 몸으로 부딪치기도 하고 잔꾀를 쓰기도 하는데, 그의 모습을 눈으로 쫓는 동안 직진본능에 충실한 포레스트 검프가 떠올랐다.
한편 후작으로서의 작위를 확고히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에 뛰어든 ‘배리 린든’의 이야기를 담은 후반부는 대부분의 무대가 성채 안으로 옮겨오는데, 실내장식이 워낙 화려해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가 생각났다. 당시로서 돈이 정말 많이 들었겠다 싶을 만큼(;;) 화면에서 잘려서 담기는 소품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공을 들였고, 배우들의 화장이나 표정도 아주 생생하다. 당시 귀족들의 끝모를 무위안일(farniente)과 영국과 독일 연합군 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의 팽팽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긴장감까지도 잘 전달되는 듯하다. ’75년도에 이미 이런 연출이 가능했다는 게 신기하다. 반 세기의 시차가 있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가 절제된 음향으로 야릇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면, <배리 린든>에는 헨델의 사라방드가 삽입되어 장엄한 느낌이 가득하다. 사라방드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이기는 하지만 그 유래는 스페인과 페르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치 마지막 투우(鬪牛)를 남겨둔 붉은 복장의 토레로(Torero)를 연상시킨다. 최후를 앞둔 배리 린든 개인으로서의 이야기는 사라방드의 무게만큼이나 비장(悲壯)하다. 출세가도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지만 끝내 평범한 아일랜드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배리 린든의 운명을 보며 참 야속하다고 느꼈다. ‘린든’이라는 이름(稱號)이 필요했다면 그(레드몬드)가 조금만 더 비열하고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어땠을까, 영화 속 아른거리는 촛불처럼 촛농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자신을 완전히 연소(燃燒)시켰다면 어땠을까.. 이처럼 나를 대신해서 끝까지 운명에 맞서 싸우는 ‘배리 린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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