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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의 놀이터일상/film 2020. 10. 8. 00:21
"What's happened happened.
Which is an expression of faith in the mechanics of the world.
It's not an excuse to do nothing."
"It's the bomb that didn't go off.
The danger no one knew was real.
That's the bomb with the real power to change the world."
<테넷>을 본 지도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영화 볼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다가 하루는 공부를 하던 중 머리를 식힐 겸 영화를 보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이라는 사실보다는, 우리말로 ‘섭리’, ‘기준’ 정도의 뜻을 갖고 있는 ‘테넷’이라는 단어에 더 호기심을 느꼈던 작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은 광활한 개념이나 거대한 서사시를 다루는 영화가 많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모두 그러하다.
어느 인터뷰에서 <테넷>의 주연 역할을 맡았던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영화 촬영을 마친 아직까지도 영화에서 말하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사실 보는 나의 입장에서도 <테넷>에 소개되는 ‘인버전’이라는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려 애쓰면서 관람하지는 않았다. ‘인버전’이라는 개념이 제공하는 새로운 세계인식 방법에 흥미를 느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보통 우리는 어떠한 현상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 할 때 ‘시간의 선후(先後)’라는 직선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테넷>에 소개되는 세계에서 사건의 인과(因果)는 단선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고리(環) 모양을 이룬다. 사건의 결말은 사건의 단초로 치환될 수 있고, 사건의 단초는 전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다른 사건의 결말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화면의 일부분만 뒤감기를 적용하는 기법이나, 인버전이 된 상태에서 호흡기를 착용하는 모습, 인버전 된 세계에서 화면의 색조를 다르게 활용하는 기법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접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느 것이 정방향이고 역방향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고, 이미 그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類似) 세계 안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자신들의 인식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닐이라는 인물과 복수에 미친 캣이라는 인물, 그리고 정의심이 가득한 주인공까지. 시간과 공간이 여러 형태로 변환될 수 있는 인버전된 세계 안에서도 불변하는 한 가지는 인식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려는 인간의 지적 본성이 아닌가 싶다.
“ Every path is the right path.
Everything could've been anything else.
And it would have just as much meaning.”
“In chess, it's called Zugzwang...
when the only viable move...is not to move.”
<미스터 스마일>, <미스터 칠드런>처럼 ‘미스터’가 들어간 영화가 많다보니, <미스터 노바디>라는 영화제목을 듣고 처음에는 한 번 봤던 영화인 줄 알았다. 간단히 시놉시스를 보고서야 본 적이 없는 영화라는 것을 알았다.
<테넷>을 볼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실험적인 기법과 스토리가 결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2009년 개봉했던 <미스터 노바디>야말로 ‘인버전’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마치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아무것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양자 운동처럼, <미스터 노바디>에서는 ‘니모’라는 인물이 소유했던 ‘두 개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두 개의 삶은 이진법처럼 0 또는 1을 택해야 하는 순간에 시작되었는데, 한 쪽의 삶에서 니모는 죽어 있고 다른 한 쪽의 삶에서 니모는 살아 있다. 즉 니모는 같은 시간선상에서 죽어 있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하다.
<미스터 노바디>에서 화면을 부분적으로 되감기하는 기법이 여러 번 활용되는 것을 보면, <테넷>에 도입되고 있는 극적인 촬영기법들이 놀라울 만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테넷>의 액션신이 빠지고, 그 공백을 서정적인 드라마가 메우고 있다는 점이 두 영화간의 차이라면 차이일 뿐.
미래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자연사할 가능성이 있는 이 ‘니모’라는 인물이 리얼 쇼프로그램을 통해 실시간으로 방영이 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니모를 자연사 시킬지 연명시킬지를 투표한다. 이 둘 중에 시청자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영화의 긴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 놀라운 결말은 아니다.
니모의 삶은 행복한 것이기도 했지만 불행한 것이기도 했고,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었지만 제자리에 멈춰 있을 때도 있었다. 그것이 앞뒤이건 위아래이건 좌우이건 니모는 늘 어떠한 방향으로 선택을 행해야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성으로 남아 있던 세계는 실제 세계로 편입되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져 있거나 과거에 대한 회한에 빠져 있을 때, 어떠한 존재가 점하고 있는 시점은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니모는 영화의 끝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은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며, 현재의 선택에 충실하라고. 그리고 때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가만히 멈추는 것밖에 없을 때가 있더라고.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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