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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 거리(شارع حيفا)일상/film 2020. 7. 22. 19:18
하이파(Haifa)는 이스라엘을 여행할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다. 레고 모양의 살구색 건물들과 에메랄드빛 지중해. 그래서 아홉 번째를 맞이하는 아랍영화제에서 <하이파 거리>를 예매할 때, 가장 먼저 이스라엘 여행을 떠올렸다. 여하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대의 영화를 고르다보니 영화의 상세정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갔다. 아랍권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매우 진귀한 기회라 어떤 영화든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이라크 영화로 바그다드의 하이파 거리라는 곳에서 벌어졌던 2006년 이라크 내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동문제를 떠올려볼 때, 아랍영화제에 소개되는 영화들은 유쾌하고 밝은 영화보다 어둡고 비참한 영화가 많은 편이다. 이스라엘의 항구도시 하이파의 온화한 풍경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몰입이 쉽지 않았다. 배경지식과 영화 속 단서들을 총동원해서 이야기의 맥락을 그려보지만, 이라크 내전이라는 게 잘 도식화되지도 않았고 영화의 내러티브도 그리 친절하지는 않았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이라크 정부에 대한 미군의 개입이 낳은 내전 양상, 출처를 알 수 없는 무기의 유입과 격화되는 게릴라전. 수많은 이해당사자들. 다큐멘터리 영화 수준의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이 작품에는 관련된 내용이 너무 조각조각 묘사되기 때문에 사건의 열쇠가 이슬람내 종파갈등에 있는지, 미국의 비뚫어진 패권주의에 있는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있는지 잘 가늠되지 않는다. 다만 '신', '명예' 따위의 단어를 동원하면서도, 밥을 먹고 숨을 쉬듯 살상을 저지르는 장면이 영화의 전면을 차지한다.
인권(Human Right)이라는 개념이 없던 근대 이전에는 처참한 고문과 형벌이 이루어지고 종교를 명분으로 사회적 낙인찍기와 살육전이 벌어지곤 했다. 인류사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겼던 시점은 없을 것이다. 한편 인권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다른 형태와 다른 의미를 띨 뿐 중세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더 간결하게 더 대량으로 살생이 진행된다. 야간에 드론을 띄워 조준사격을 하고, 핵무기 하나로 도시 하나를 섬멸(殲滅)한다. 우아하고 세련된 유희. 톡톡 손가락을 튕기듯 가볍게 목숨을 짓밟는 유희.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했던 시뮬라르크의 한 형태. 이전에는 칼과 창, 활로 사람 목숨을 가르던 것이, 지금은 조작버튼 몇 개와 영상화면으로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손아귀로 직접 칼을 감싸쥘 때와, 검지손가락 끝으로 버튼을 눌러 회로구조도 모르는 복잡한 기계를 한 번 거칠 때와는, 살상의 무게감이 달라지는 법이다. 무기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매뉴얼을 정독하면 전투력을 얼마든 높일 수 있다. 단련은 생략된다. 더는 전쟁에서 군대의 사기가 중요해지지 않는다. 이는 게임 속 이야기가 아니다.
아랍영화제를 알게 된 뒤로 4년째 해마다 가고 있기는 하지만, 올해는 행사 개최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원래도 수익을 목적으로 한 영화제는 아니지만(올해 티켓가격은 천 원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수용할 수 있는 관람객수까지 3분의 1수준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영화를 주최하는 측에서도 어려운 점이 정말 많았을 것 같다. 여러 배려와 안전조치 안에서 영화제가 진행되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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